희망의 글

직면하게 된 장벽과 전도의 창의적 방법 찾기 (총회 국내선교부 자료집 '코로나19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전도'의 글)
2021-12-07 11:48:55
권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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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전도

목회적 성찰과 전망

직면하게 된 장벽과 전도의 창의적 방법 찾기

권대현 목사(광주제일교회 위임목사)

 

들어가는 말

코로나19이후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단절’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5인 미만으로 만나야 하는 관계의 제한을 통해 사람들 간의 만남에 단절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사회전체에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냈고, 교회 또한 예배 이외의 모든 모임을 제한받으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관계와 만남의 단절은 마치 우리의 삶에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커다란 벽을 만나는 것과 같다.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압도적으로 크고 높은 벽과 같다. 에블링 페레 크레스탱의 「벽」이라는 책에서 벽에 대해 설명한다. 벽(mur)이란, 단절, 고립, 편견, 오해, 대립, 곤경, 막막함을 대변하는 단어이다. 사람 간에 말이나 뜻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그 답답함을 '벽에 대고 말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하는 어려움에 봉착하였을 때 '벽에 맞닥뜨리다'라고 말한다. 또한 아주 막막한 순간, 사면초가라는 말과 함께 '사방이 꽉 막힌 벽 사이에 갇히다'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그리하여 결국 막막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절박의 심정으로 '벽을 등지고 서다' 혹은 '벽에 머리를 박다'라고 한다. 말만으로도 답답하고 그저 막막하다. 혹은 사람과 세상에서 고립과 소외를 맛보았던 사람, 혹은 사람사이에 소통의 절망을 느낀 사람은 자신만의 벽을 만들어 그 안에 스스로 숨어들어 버린다.

이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하게 된다. 하나는 자신이 스스로 만든 관념과 편견과 상황의 벽 속에서 들어가는 것이다. 사면으로 둘러싸인 벽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살아간다는 것, 차라리 그 곳이 더 편안할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는 벽을 부수고 벽을 넘어서는 것이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벽을 뛰어넘든, 깨뜨리든, 그 때의 벽은 장애물이며, 싸워나가야 할 장애물이며, 방해꾼이고 적이다. 그러나 제3의 방법은 없을까.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은 없을까가 큰 고민이다.

 

코로나19로 맞이하게 된 상황

코로나19는 전 세계에 서서히 다가오고, 빠르게 벽을 세웠다. 이전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를 창조했다. 작은 바이러스 하나가 사람들의 삶의 패턴을 일순간에 바꿔 놓았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마스크를 쓰고 생활해야 하고, 사람들과 대면하고 가까이에서 만나는 일이 부담스럽고, 누군가가 전염의 대상으로 이해되는 상황들은 인간관계를 무너뜨릴 뿐 아니라,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폐업이 속출하는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 더 이상 세계가 하나라고 하는 세계화는 불가능하게 되고, 지역화가 가속화되고 있으며, 국가들은 자신을 보호하는 이기적인 면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백신의 개발 이후, 백신은 부유한 국가를 중심으로 분배되고 있으며, 가난한 국가들은 백신을 구하기도 어렵다. 환경의 문제는 지구의 종말을 앞당기는 듯한데, 쓰레기와 탄소배출은 줄어들고 있지 않다. 필요한 것은 알겠는데, 필요보다 생존과 안전의 가치가 더욱 크게 나타나며, 그 사이를 비집고 자기 이익과 편리가 더 힘차게 나타나고 있다.

교회의 상황들도 다르지 않다. 소수의 교회들이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은 것과 그들이 가진 보수적 신학은 교회에 어려움을 증폭시켰고, 언론은 교회의 부정적 이미지와 소수교회의 잘못은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교회의 대 사회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다. 교회는 정부의 통제의 우선순위가 되고, 비대면과 예배 참석인원은 좌석수 20% 혹은 30%에 묶이고, 모임과 식사를 전면적으로 금지 당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코로나 이후 임대를 하는 상가교회들은 임대료를 내기가 어려워졌고,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교회도 늘어나고 있다. 이에 목회자들의 수를 줄이거나 사례비를 감축하는 일이 생기고, 온라인 사역으로 인해 사역의 부담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성도들은 예배에 오는 것이 부담스럽고, 회사와 정부에서 강제로 제한하기도 한다. 또한 일 년 넘게 온라인 예배를 드리며, 예배의 현장에 오지 않아도 편리하게 집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 일이 익숙해지고 있다. 다음세대도 미래의 신앙을 담보하기 어려워졌다. 가장 큰 문제는 전도와 해외선교가 어려워지거나 막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남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국가간에 해외로 나가는 것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전도나 선교는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하는 분야 중의 하나이다. 이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커다랗고 높은 벽과 같기에 선명한 대안츨 찾기 조차 어렵다.

 

한국교회의 전도 방향의 한계

한국교회의 전도 방향은 코로나19시대에 임계점에 도달했다.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전도는 지역사회를 바탕으로 한다. 노방전도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커피나 차를 대접하거나 작은 물건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또 다른 방법은 동원을 위한 행사 즉 전도행사이다. 외부의 유명한 사람들이나 설교자를 초청하여 사람들을 전도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전도 방법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동시에 교인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은 이미 한계를 노출하기 시작했다. 효과가 예전과 같지 않은 것이다.

코로나19이후 이전의 방법이 갖게 된 한계는 더욱 선명하게 나타났다. 첫째, 사람과 사람의 접촉의 한계이다. 특히 자신의 가족이나 함께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 즉 매일 만나거나 필수적으로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익명성을 가진 사람들과의 접촉은 꺼린다. 그러한 의미에서 노방전도나 작은 물건이나 차를 나누어 주는 행위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다. 코로나19이후 언론은 교회에서 일어난 코로나19의 전파를 크게 보도하였으며, 신천지나 이단을 통해 전파된 코로나19도 모두 기독교라는 이름에 포함시킴으로써 사회가 가진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와 신뢰도는 바닥을 치게 된다. 이러한 때에 누군가가 교회에 가자고 말하거나 전도를 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 세 번째로, 교회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많은 익명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지 않고 조용히 예배를 드리고자 하고, 그 이후에 등록을 원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입구에서부터 출입에 벽을 마주하게 된다. 출입을 위한 QR코드를 발급 받아야 하고, 그 때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노출해야 한다. 교회의 문턱이 높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점에서 교회는 그 동안의 전도의 방향과 방법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길을 찾아 나서다

앞으로 우리는 어떠한 방향의 전환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비슷하겠지만 교회는 방향을 ‘공공성’에 눈을 뜨는 기회가 되었다. 가장 먼저는 지역사회 교회 중 상가임대를 통해 교회공간을 확보하는 교회들을 돌보는 것과 지역사회의 어려운 소상공인들과 수입의 감소로 삶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전에도 있었던 관심이지만, 더욱 적극적으로 도움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교회 내부에서는 코로나19 기간 동안 교회에 가장 많이 출석하지 못하는 그룹은 크게 둘이다. 연로하신 어르신들과 어린 아이들과 젊은 가정이다.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하고 가장 많은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코로나19는 목회지형 자체를 바꾸고 있다. 그 동안의 목회가 가진 의미는 무엇인가. 교회가 가진 본질적인 사역은 무엇인가. 교회를 무엇이고, 목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하게 했다. 먼저 광주제일교회가 어떤 사역을 했는지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

 

1. 지역교회를 돌보다

교회들은 현장에서 드리는 예배를 온라인으로 예배를 전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아직 온라인으로 헌금을 드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한국교회에 재정적 어려움이 닥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광주제일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교회들은 문제가 훨씬 크게 나타났다. 상가임대를 하고 있는 교회들은 임대료와 목회자의 사례비가 당장 문제가 되었다. 당회는 이와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본 교회가 속해 있는 전남노회와 같은 지역인 상무지구의 지역교회들을 위한 목적헌금을 결의했다. 광주제일교회 조차도 온라인 헌금을 시작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를 홍보하고 ‘상가형 임대교회 지원 목적헌금’을 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광주벧엘교회도 동참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두 교회는 전남노회에 속한 각 시찰회에 연락하여 지원이 필요한 교회를 파악하게 되었고, 각 교회에 50만원씩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본 교회의 목적헌금은 3월 한 달 동안 진행되었고, 처음에는 2,000만 원 정도를 예상했으나, 3월이 지난 이후에도 목적헌금을 종료한다고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결국 약 2,700만 원 이상의 목적헌금이 모아졌고, 전남노회에 속한 48개의 교회와 3개의 지역교회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2021년 부활절 헌금의 절반인 1,200만원을 같은 시찰회에 있는 24개의 교회에 나누었다. 지역교회들을 위해 두 차례의 나눔의 작은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성도들은 헌금이 사용되는 선의와 구제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목적성과 시의성에 있어서 충분히 공감하고 있고, 얼마든지 헌신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대구지역의 어려운 이웃

호남지방의 광주에 위치하고 있는 본 교회는 영남지방의 대구삼덕교회와 오래전부터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두 교회의 찬양대가 자리를 바꿔 교환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는 교류가 없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다시 대구지역의 교회에 눈을 돌리게 했다. 코로나19가 대구지역을 강타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대구지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대구삼덕교회에 전화로 목회적 안부를 물었고, 대구삼덕교회가 운영하는 삼덕노인복지센터와 연결하게 되었다. 광주제일교회는 1년에 절기봉헌 중 가장 많은 봉헌이 나오는 부활절 봉헌과 추수감사절 봉헌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기로 연 초에 결의되어 있었다. 작년에는 고성산불을 위해 지원을 했고, 올 해는 대구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지원하기로 했다. 얼마 전 목적헌금을 했던 터라, 부활절 봉헌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년처럼 약 2,000만 원 정도의 헌금이 모였다. 그래서 대구삼덕교회가 운영하는 삼덕노인복지센터에 필요한 수요와 어떤 물품이 필요한지를 묻고 넉넉한 박스 200개를 준비하여 생필품들을 가득 채웠다. 이를 위해 약 1,500만 원 정도를 사용했다. 아직 본 교회도 예배를 현장에서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사회봉사부에 속한 부서원들이 봉사를 위해 오랜만에 교회를 나오게 되는 기회가 되었고, 그들은 물품을 박스에 포장하여 대구로 보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구삼덕교회의 부목사님, 두 분의 장로님, 노인복지센터의 센터장과 직원이 본 교회를 직접 방문하여 감사의 인사를 하러 광주까지 오셨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대구에서 오는 사람들에 대한 불안함을 가지고 만남을 쉽게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반갑게 그들을 맞이하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교회간의 우정을 다시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나머지 약 500만원은 대구청소년지원재단에 가출청소년 온라인 학업지원을 위해 수업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면서 필요한 테블릿을 17대 지원하게 되었다. 초대교회도 어려운 지역의 교회들을 위해 봉헌을 보냈던 것처럼 가까운 지역을 넘어서 어려운 교회를 돕는 것을 실천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후에 대구삼덕교회는 생필품을 받은 분들을 영상에 담아 감사의 표현을 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두 지역 교회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누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당회는 ‘선한 사마리아인 기금’을 마련하기로 결의했다. 예산의 5,000만원을 기금으로 마련하여 광주지역사회의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기로 결정했다.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어려운 이웃을 향한 나눔이 줄어들고 있었다. 우리가 속한 광주 서구에서 가장 어려운 이웃들이 많이 사는 곳을 선정했다. 서구와 연락하여 한 곳을 지정하게 되었고, 그곳에 생필품 상자 800박스를 제작하게 되었다. 새로 피택자들과 사회봉사부가 함께 보여 박스를 제작하였고, 이를 서구의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게 되었다. 어려운 이웃들은 늘 우리 주변에 있을지 모르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나누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3. 부활절 사랑의 택배

교회는 예배와 구제 두 가지로 압축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목회의 부분들이 멈추었지만 예배와 구제의 부서만 활발하게 움직이며,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되었다. 이제 상황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다음세대의 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했다. 부활절예배를 현장에서 드리지 못하게 되면서, 다음세대가 걱정이 되었다. 영상으로 가정에서만 예배를 드리며 부활의 기쁨을 느끼게 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학교는 ‘사랑의 택배’를 기획했다. 교육부 교역자들과 교사들은 부활의 기쁨을 알리는 선물 박스와 박스 안에 손 편지를 넣어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안부를 묻고,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마음을 담아 다음세대 아이들과 학생들의 가정에 직접 방문했다. 물론 비대면으로 하기 위해 택배형태를 취했다. 집 앞에 부활절 선물을 놓고 연락을 하기도 했고, 직접 나와서 얼굴을 보고 싶은 어린이와 학생들은 함께 나와서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만남을 통해 기쁨을 나누었다. 덕분에 어린아이들은 그 동안 성탄절에만 선물을 받아서 성탄절만 큰 절기인 줄 알았는데, 부활절의 선물을 통해 부활절이 성탄절만큼 의미있고 큰 절기인지를 알게 되었고, 교회에서 만나 직접 얼굴을 대면하고 드리는 예배가 소중한지, 만남이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절 사랑의 택배의 의미였습니다.

 

4. 따뜻한 선물 나눔

교회 내부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은 연로한 어르신들과 어린아이들이다. 그래서 기회한 것이 선물나눔이다. 코로나19로 몇 달이 지난 때였다. 먼저, 50세 이상의 어르신들이 카카오톡 선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모으기로 했다. 그래서 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젊은 가정들에게 나누며,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으니, 부모들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의 수도 많아졌다. 젊은 가정을 격려하는 방법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나누며, 함께 작은 신앙서적을 나누었다. 그리고 6개월 쯤 지나서 젊은 가정들은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젊은 가정들이 나이 많으신 어르신 중 홀로 계신 분들에게 선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교구마다 10명씩을 선정하여 40명의 어르신들에게 직접 준비한 선물과 생필품을 나누는 따뜻한 선물 릴레이가 이어졌다. 또한 담임목사는 80세 이상의 어르신들에게 ‘위로의 책’이라는 책을 직접 손편지를 써서 선물하였고, 교회학교 영유아부부터 고등부까지의 학생들에게도 연령에 맞는 책을 모두 선물하여 지치고 힘든 상황에서 누군가가 옆에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따뜻한 선물을 나누었다.

 

방법 속에서 찾아가는 방향

위와 같은 다양한 노력은 비단 광주제일교회의 사역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교회든 교회가 처한 위치가 상황과 부르심 속에서 지역교회와 사회와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을 향한 방법을 찾아간다. 이러한 방법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 동안 내부의 문제에 관심을 갖느라, 외부에 문제에는 많은 신경을 쓰지 못했다. 목회자의 설교는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를 하느라, 오늘 여기의 이야기에 관심을 많이 갖지 못했다. 물론 한국교회의 분위기와 인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코로나19는 모든 교회의 모임과 프로그램이 멈춘 상황에서 예산을 어디로 사용해야 하는지, 교회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했다. 자연스럽게 교회의 예산과 방향은 교회 내부에서 교회 외부로 향하게 되었다. 이것 자체는 전도에 있어서도 교회 전체의 인식을 바꾸었다. 교회 내부에 집중하던 관심을 교회 외부로 향하게 하였다. 이에 필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 선교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빛으로 존재하며, 선교공동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치고 배우기 이전에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방향을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게 했다. 이것이 중요한 변화 중 하나이다. 여기에 함께 따라오는 것은 성도들의 자존감이다. 교회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거나 교회의 예산을 교회 내부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외부의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의 가치를 알고 행하면서, 성도들은 교회의 존재이유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방향을 배우게 되었다.

두 번째는 공공성의 확대이다. 교회의 방향은 외부로 향하고 있을지라도, 전도 자체를 위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것을 수단화하는 경향성을 가져왔다. 어떤 사회봉사와 나눔을 하더라도 결과는 교회로 출석해야 했고, 교인으로 등록해야 했다. 이 결과를 위해 모든 것이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새롭게 깨닫게 한 것은 공공성이다. 코로나19 이후, 비기독교인들이 갖는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이미지는 ‘이기적이다’라는 것이다. 교회는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웃을 위해 봉사와 나눔을 하더라도 결국은 자기 자신의 외연을 확대하기 위한 것으로 비친 것이다. 교회는 더욱 폭넓고 대담하게 공공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예산을 사용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돕고, 나누며, 손해보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이것을 낭비처럼 여긴 것이다. 이제 교회는 방향에 있어서, 공동선이라고 하는 교회가 본래 지향하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고, 공공성의 확대로 나아가야 한다. 지역사회와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이유와 전도의 목적을 넘어서는 공공성을 가져야만 한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이후에 전도의기회를 상실하게 될 것이고, 선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얄팍한 수단화로부터 묵직하고 대범한 교회의 존재 목적인 세상의 빛으로 존재해야 한다.

셋째는 교회 내부의 인식의 전환이다. 교회는 내부에서 조차 어려운 성도들을 도울 때에 자발성을 가지지 못했다. 나 자신의 신앙과 제직회의 구조 안에서만 활동하고 사역을 감당하지,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내고 돕는 일에 그리 적극적이지 못했다. 교회 내부에 갑자기 경제적 어려움과 심리적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돕는 자발성은 전도를 위한 또 다른 가능성으로 자리하게 된다. 누군가를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부터 전도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를 멀리서 찾지 않고, 어르신들은 젊은 가정과 어린이들을, 젊은 성도들은 외로운 어르신들을 돌보는 마음 자체가 이후에 전도를 위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넷째는 전도는 단순히 비기독교인을 향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세대는 또 다른 전도의 영역이 될 것이다. 교사는 수직적 선교사이다. 다음세대가 신앙을 갖는 비율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인구의 감소가 영향이 있지만, 이를 넘어서 다음세대는 종교를 가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전도를 위한 영역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코로나19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다음세대였다. 이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수직적 전도를 위한 방향이 필요하다 하겠다.

 

전도를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

코로나19는 목회현장에 새로운 응답과 새로운 형태의 시도들을 요구한다. 그것은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코로나19가 교회에서의 만남과 모임이 불가한 상황을 만들었기에 교회의 온라인이 강화되고, 줌(Zoom)을 활용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목회의 다양한 부분인 예배와 구제와 교육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시도들을 하게 되어 오고 있다. 그 방법은 마치 이슬람지역을 위한 선교처럼 창의적 접근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토마스 쿤(Thomas Kuhn)이다. 그는 ‘과학구조의 혁명’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패러다임이란,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각 학문분과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세계관 구조와 결합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시각을 갖고, 비슷한 가정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사회과학에서 예전의 패러다임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즉,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하는 천동설을 모두가 가지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서 과학도 동의한다. 동시대의 사람들의 같은 패러다임이다. 그런데, 어느 날 코페르니쿠스에 의해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하는 지동설을 주장한다. 이 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을 시작한다. 이후에 오랜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마치 오늘날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겼지만 아직도 지동설과 같은 생각과 관념을 가지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조금씩 무엇인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과 본질의 변화이다. 이 말을 바꾸면, 패러다임의 핵심은 방향의 이동이다. 나를 중심으로 했던 방향이 너를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앙이 나로부터 하나님으로의 전환인 것처럼, 나와 교회를 중심으로 한 방향이 너와 이웃을 중심으로 한 방향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마치 벽이란 누군가를 보호하는 역할을 통해 추위와 바람을 막기도 하지만, 이웃을 향해서는 담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을 바꾸려면, 벽을 헐 수도 있지만, 제3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벽이 누군가가 기댈 수 있는 언덕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보자기 인문학

이어령씨의 「보자기 인문학」이라는 책에 보면, ‘병풍의 의미론’이라는 장이 있다. 서양을 벽의 문화, 동양을 병풍의 문화라고 한다. 특히 병풍을 대표하는 것이 한국문화라고 한다. 서양문화는 타인의 눈이 미치지 않는 은신처, 외부와 단절된 울타리, 자신만의 영역, 인간의 자신만의 성이 필요하여 벽을 두껍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두꺼운 벽은 지하실이다. 대지의 두께만큼, 그런데 그것이 어느 날 감옥으로 변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문화에는 병풍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얇은 벽이다. 이는 바람을 막는다고 하여 병풍이지만, 병풍을 앞에 두면 방어하는 배타적인 것이 되지만, 뒤에 두면 무엇인가를 맞이하는 자세가 된다. 임금이 신하를 알현할 때 뒤에 두고 사용하여 원광효과를 얻기도 하고, 아이는 출산중인 어머니를 둘러싸고 있는 병풍 속에서 태어나며, 아이 뒤에 병풍을 세우면 돌잔치가 되고, 젊은 남녀 뒤에 금병풍을 세우면 결혼식이 되고, 백발의 노인 뒤에 십장생 그림이 그려진 병풍은 회갑연이 되고, 하얀 병풍이 처지면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구분하는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나와 타인을 택일하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열리고 닫히는 융통성이다.

         벽은 한편으로 우리들 삶을 거칠고 황량한 바람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든든한 보호자이다. 기댈 수 있는 의지 처다. 거친 비바람 속을 걸어 문을 열면 그곳에 가장 편안한 나만의 공간 혹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럴 때 벽은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이다. 절망스러울 때, 기대고 앉아 마음을 다독거리기도 하고 외로움과 허전함에 벽을 기대고 앉아 허공 바라기 하다가 가슴에 돋는 별 하나 있어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이럴 때 벽은 쓰러지지 말고 잠시 기대었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독려해주는 고마운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벽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경계하고 있으며, 나와 너, 나와 다른 사람들이나 세상 모든 사물들과 존재를 구분하면서 동시에 이어주는 역할로서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한 함께 해야 하는 그런 존재이다. 이것이 벽의 제3의 역할이다.

 

방향의 전환

우리는 전도의 방향에 있어서 제3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4가지의 방향 전환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 공공적 주제 찾기, 둘째, 모든 성도의 전도, 셋째, 독자적 전도에서 융합으로, 넷째, 선교공동체로의 정체성의 회복이다. 이 주제를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1. 공공적 주제 찾기

전도의 방향에 있어서 공공적 주제 찾기가 필요한 이유는 교회가 전도를 위한 사회적 분위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회는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부정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교회에 나오라고 전도지를 나누는 것으로 전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나 공감하는 주제를 찾아야 하며, 그것은 공공성을 띄어야 한다. 이 때 주의할 것은 전도의 의미를 협의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되고, 광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를 직접적으로 교회로 데려오고, 교인으로 등록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공적이고,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한 것, 성경이 가진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고 실천하는 폭넓은 것이 필요하다. 전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공적인 영역에서 누구나 중요하다는 것을 함께 공감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와 보편적 가치로의 확장이 필요하다. 교회가 가져야 할 것은 사회와 지역사회와의 연결점을 갖는 것이다. 또한 신뢰를 줄 수 있는 주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코로나19 이후에 중요한 이슈 중 하나는 환경문제이다. 지구의 환경의 문제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며, 성경이 말하는 창조질서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와 교회 모두가 동의하는 주제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가진 이미지를 재고할 수 있는 것이며, 전도에 간접적이고, 직접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신학적으로 보면, 구속사 신학으로부터 창조신학으로의 접근이 필요해졌다.

 

2. 모든 성도의 전도로

두 번째는 참여자가 소수의 참여자로부터 모든 성도가 전도하는 참여자가 되는 방향의 전환이다. 그 동안은 소수의 사람들만 참여하여 지역사회에 노방전도를 하든지, 병원선교를 하든지 스스로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만 전도에 참여했다면, 코로나19 이후에는 전도가 모든 성도들의 사역이라고 하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해외선교도 역시 외국으로 갈 수 있을만한 열의와 비싼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재정상태와 적어도 일 주 일 이상의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들만 단기선교에 참여할 수 있는 선교가 아니라, 그 방향성을 국내에 있는 이주민의 영역으로 전환을 모색하여 모든 성도가 이것이 우리가 가진 본질이며 사명임을 깨닫고, 참여자가 되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전도집회’나 ‘초청잔치’의 일회성 전도를 통해 책임을 면하게 하고, 일시적 동원을 강조했다면, 이제는 삶에서 모든 성도가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가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삶의 자리에서 전도하는 형태로 모든 이가 모든 사람을 전도하는 형태로 방향이 전환되어야 한다.

 

3. 독자적 전도에서 융합으로

세 번째는 전도가 전도라고 하는 독자적인 사역으로부터 다른 사역들과의 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는 대부분 ‘영역’에 대한 카테고리로 나누었다. 교정전도는 구치소와 교정시설에서의 전도이며, 군선교는 군이라는 특수한 대상과 기관에서의 전도이이고, 병원전도는 병원이라는 영역에서 환자들을 위해 전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영역을 넘어서서 교회가 가진 다른 사역 즉 교육, 봉사, 친교 등의 다른 사역과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이루어야 한다. 전도가 전도로부터 벽을 넘어 교육과 융합을 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다음세대를 위한 복음 전파가 전도라고 하는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역사회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봉사와 전도가 함께 융합된 형태를 찾아야 한다. 전도와 함께 지역사회와 함께 친교하는 융합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 전도가 영역이 아니라, 다른 사역들과 함께 융합하는 다양한 방식으로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서 전도부라고 하는 부서가 함께 동역하거나 다른 사역들을 함께 할 수 있는 구조와 예산을 공유하는 일도 필요하다. 그 모양을 융통성 있게 접근하며, 목적을 위해 다양한 방법과 연결과 융합을 추진하는 교회 내부의 부서와 예산의 벽을 허물는 일이 필요하다.

 

4. 선교적 교회로의 전환

넷째, 교회는 교회가 가진 본질과 정체성을 다시 세워야 한다. 선교적 교회를 ‘missional church‘라고 하는데 교회의 정체성이 ‘선교적’이라고 하는 방향을 갖는 것이다. 풀이하면, 지역사회를 위해 존재하며, 선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는 교회가 가진 그 동안의 고착된 예배를 드리고, 일반사회와 다른 종교적 이미지가 아니라, 지역사회를 위한 다양한 표현들과 접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지역사회의 사람들과 가까이에서 지역사회에 필요한 모습을 갖고, 선교적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전체적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다시 찾는 일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가 교회의 목적이라고 이해하지만, 예배가 목적인 공동체라면 교회는 내부에 갇히게 될 것이고, 교회가 가진 역동성을 잃어버릴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중 하나만을 선택하는 일이 될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은 후, 밖으로 나가 이웃을 사랑하고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본질은 선교이기에 교회는 선교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통곡의 벽

         오늘날 이스라엘에는 하나의 벽이 있다. 원래 이 벽은 솔로몬이 세운 성전의 서쪽 벽이다. 로마는 AD.70년 로마의 군대가 제우스 신전과 황제의 동상을 건립하기 위해 유대인을 내쫓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며, 그 위세를 후대에 보이고자 남겨둔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 벽. 그 벽이 지금은 유일하게 남아 ‘통곡의 벽’이 되었다. 성전의 벽이 무너졌지만, 백성을 위한 통곡의 벽이 된 것이다. 전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히브리민족은 상처와 고통, 다시 땅으로 돌아올 것을 염원하며, 통곡의 벽의 틈에 소원과 열망을 담아 쪽지를 끼운다.

         성전 파괴는 오히려 자신과 왕권을 위해 닫힌 공간을 열린 공간으로 만들었다.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은 종교인들이 독점하는 공간이 백성을 위한 열린 공간이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전의 휘장을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공간을 연 것처럼 말이다. 이곳은 나의 백성을 위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나의 백성이 나와 만나며 예배하는 열린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예루살렘 성벽’의 뜻이었다. 교회는 모든 백성이 기댈 수 있는 벽, 찾아와 울 수 있는 위로의 벽, 그들을 보호하고 품을 수 있는 벽, 그들을 구원하는 성벽으로 세워져야 한다. 이것이 제 3의 방법을 찾아가는 패러다임의 변화이며, 방향의 전환일 것이다.

 

나가는 말

         광주의 초기 선교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다. 광주선교부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양림’이라는 곳이었다. 지명만 생각해면, 수풀 림이라 생각하여 나무가 많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한 마디로 민둥산 풍장 터였다. 풍장이란 시체를 한데에 버려두어 비바람에 자연히 없어지게 하는 장사법이다. 사람들의 시체로 가득한 곳이어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그곳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였던 배유지, 오원 선교사가 선교부를 세우게 되고, 나무를 심었다. 참나무, 팽나무, 은단풍나무, 백일홍, 선교사가 가져온 흑호두나무를 심어 양림을 울창하게 만들었다. 굶주린 백성을 위해 피칸과 흑호두를 심었고 미래 한국을 바라보며 희망을 심었다. 그 선교의 결실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 마치 죽음의 장소였던 갈보리, 사람을 사형을 집행하던 곳에 세워진 십자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분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출발되고 부활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희망이 찾아왔다.         

우리는 지금 생명의 씨앗을 다시 뿌리는 전도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이전에 방법은 현재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새로운 방향과 방법을 찾아 나서야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 때 다시 본질로 돌아가며, 오늘의 시대를 이해하는 방법 더 깊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며, 각자의 자리에서 시대와 지역사회에 맞는 전도의 방법을 찾아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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