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언제입니까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자주 ‘아직’이라는 말에 머뭅니다. 아직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고,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으며, 아직 기다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 속에서 오늘을 보류한 채 살아갑니다. 그때가 오면 조금 더 평안해질 수 있을 것 같고, 그때가 되면 믿음도 한층 단단해질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보다는 미래를 더 자주 바라보고, 현재의 시간은 준비 단계로만 취급하곤 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와 기준 속에서 기다림은 종종 무능으로 오해되고, 멈춤은 뒤처짐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시대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불안이 일상이었고,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여십니다. 성탄을 향해 가는 이 계절은 우리가 미래를 앞당겨 쥐도록 부추기기보다, 지금 이 시간 안에 이미 스며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가만히 바라보게 합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서 주어진 징조는 크고 분명한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은 당장의 위기를 해결해 주는 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느리고, 너무 연약하며, 너무 멀게 느껴질 수 있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느림과 연약함을 통해 자신의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단번에 정리하기보다, 생명이 자라는 시간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이름은, 상황이 달라져야 하나님이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상황을 통과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징조는 문제를 지워 버리는 해답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전히 떠나지 않으셨음을 기억하게 하는 표지입니다. 이 말씀 앞에 서면 우리는 조급히 결론을 내리기보다, 하나님이 어떤 시간 안에서 일하시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문득 묻게 됩니다. 우리가 기다리던 ‘그때’는 정말 오지 않은 미래일까요. 혹시 하나님은 이미 시간을 열어 두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다른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탄은 준비가 충분히 된 인생을 향한 보상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삶 한가운데로 하나님이 조용히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임마누엘의 시간은 요란하게 시작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앞당기려 하지 않으시고, 더 빨라지라고 재촉하지도 않으신 채,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함께 머무르십니다. 이 묵상의 자리에서 우리는 서둘러 답을 정리하지 않아도 되고, 신앙을 설명할 말들을 급히 찾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하나님이 이미 우리 곁에 계시며, 지금 이 시간 속에서도 조용히 일하고 계심을 가만히 바라보고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계신 이 시간을 믿음으로 품고, 아직 오지 않은 ‘그때’를 앞당겨 붙잡기보다 오늘 주어진 하루 안에서 하나님의 동행을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의 시간은 더 이상 공허한 기다림이 아니라 은혜가 머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단지 기억해야 할 신앙의 고백이 아니라, 오늘의 선택과 태도를 이끄는 중심이 되어, 분주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걷는 속도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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