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검은불꽃

20260810 [역대상 13:7-11]
2026-08-10 06:16:46
광주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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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보다 경외함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역대상 13:10]


    역대상 13장을 읽다 보면 처음에는 다윗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고 싶었습니다. 오랫동안 기럇여아림에 머물러 있던 법궤를 다시 이스라엘의 중심에 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백성들도 함께했습니다.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을 울리며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해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도 있었고 열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기쁨 한가운데에 아주 짧은 문장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법궤를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어 옮기도록 말씀하셨고, 성물을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민 4:15, 7:9). 그런데 다윗과 백성들은 새 수레를 준비했습니다. 아마 그들에게는 그것이 더 안전하고 좋은 방법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새것을 준비했으니 하나님께 소홀히 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수레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어깨를 대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새 수레는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돌려보낼 때 사용했던 방식이었습니다(삼상 6:7-8).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방식이 어느새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자연스러워져 있었습니다. 이 장면이 낯설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오래 해 온 일이니 경험대로 하고, 잘 아는 일이니 기도하지 않고 결정하고, 좋은 뜻으로 하는 일이니 내 방법도 괜찮을 것이라 여깁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마음은 분명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데, 선택하는 순간에는 말씀이 아니라 내 생각이 앞서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고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만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서도 길을 잘못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이 있다고 해서 순종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 필요했던 것은 더 좋은 수레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말씀을 다시 듣는 일이었습니다.

    그 수레가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었습니다. 법궤가 흔들렸고 웃사는 손을 뻗어 붙들었습니다. 눈앞에서 궤가 흔들리니 손부터 나갔을 것입니다. 넘어지지 않게 붙잡으려 했을 뿐인데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이 말씀은 읽을 때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웃사의 행동만 놓고 보면 악한 의도를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웃사 한 사람의 순간적인 행동만으로 읽기보다 그 앞에 있었던 새 수레에서부터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놓치고 출발한 길이었고, 그 길 위에서 결국 사람이 자기 손으로 법궤를 붙드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법궤는 오랫동안 웃사의 아버지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습니다. 웃사는 법궤를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성경이 웃사의 속마음까지 설명하지 않으니 그가 법궤를 가볍게 여겼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장면 앞에서 ‘익숙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거룩한 것도 오래 곁에 두면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처음 예배드릴 때의 간절함이 어느새 사라지고, 처음에는 마음을 붙들었던 말씀도 많이 들었다는 이유로 쉽게 지나갑니다. 기도도 오래 하면 익숙해지고 봉사도 오래 하면 능숙해집니다. 익숙해지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익숙해지면서 하나님 없이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일을 처리할 수 있고, 말씀 앞에 오래 머물지 않아도 판단할 수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아도 맡은 일을 제법 잘 해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가 하나님의 일을 붙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웃사가 법궤를 붙들었던 손이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붙들어 지켜야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을 지키신 분도 하나님이셨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셨으며, 법궤 곁에서 살아온 웃사의 생명도 하나님의 손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여기까지 온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반대였습니다. 힘이 빠졌을 때도 놓지 않으셨고, 길을 잘못 들었을 때도 돌이키셨으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셨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경외함일 것입니다. 하나님 가까이에 오래 있을수록 하나님을 쉽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더 조심스러워지고, 말씀을 많이 알수록 남을 판단하기보다 내 마음을 먼저 살피게 되고, 맡은 일이 익숙해질수록 내 능력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의지하게 되는 것. 신앙의 연수가 쌓인다는 것은 그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웃사가 죽은 뒤 다윗은 법궤를 더 이상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기뻐하며 시작했던 행렬이 멈추었습니다. 법궤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다윗에게 그 시간은 꽤 아팠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사람이 죽었고, 자신이 세운 계획도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일을 지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배웠습니다. 역대상 15장에서 다시 법궤를 옮길 때 그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대상 15:13)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법궤를 어깨에 멥니다. 처음 실패한 자리에서 방법을 조금 고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다윗 자신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모셔 오는 일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에게도 이렇게 멈추는 시간이 있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고 최선을 다했는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다했는데 관계가 어려워지고, 열심히 섬겼는데 오히려 마음만 지치기도 합니다. 그때는 멈춘 것이 아깝고 실패한 것 같아서 서둘러 다시 움직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필요했던 시간이 멈추어 있던 그 시간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 앞에서 가만히 돌아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따지는 것보다 내가 하나님보다 앞서가지는 않았는지, 말씀을 듣기보다 내 생각을 고집하지는 않았는지, 익숙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가볍게 대하지는 않았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열심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열심 안에 경외함을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길은 처음과 달랐습니다. 새 수레는 사라지고 말씀대로 법궤를 멘 사람들의 어깨가 남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많이 했는가보다 누구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잊지 않고, 손에 익은 일일수록 한 번 더 하나님을 의지하며, 내가 옳다고 생각될 때에도 말씀 앞에서 내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내 열심이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고 익숙함 때문에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작은 일 하나를 선택할 때에도 말씀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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