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앞에 앉아 있는 사람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사무엘하 7:18]
인생의 거센 파도가 잦아들고 비로소 안온한 왕궁에 머물게 될 때, 우리 영혼은 어쩌면 고난의 광야를 지날 때보다 더 위태로운 시험대 위에 서게 됩니다. 결핍과 추위 속에서는 살기 위해 처절하게 하나님을 붙들며 그분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지만, 삶이 안정을 찾고 대적이 물러간 안식의 자리에서는 어느덧 ‘내 힘과 지혜’로 이 모든 성을 쌓았다는 오만이 은밀하게 고개를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 다윗은 세상이 우러러보는 영광의 보좌를 뒤로하고, 가장 먼저 여호와 앞이라는 고요한 지성소로 들어가 앉았습니다. 그것은 화려한 성공 뒤로 자신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신 숨결 위에만 세워져 있음을 한순간도 잊지 않으려는 거룩한 영적 몸부림이었습니다. 왕이라는 무거운 관을 쓰고서도 그 내면에는 여전히 주님의 자비 없이는 단 하루도 숨 쉴 수 없는 한 사람의 가난한 예배자가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박수 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 그 화려한 순간에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로 머물기를 선택한 이 정막한 시간이야말로, 높아질수록 메마르기 쉬운 우리 영혼을 끝까지 살려내는 유일한 생명줄이 됩니다. 이러한 자발적인 낮아짐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지난 삶의 궤적을 돌아보는 깊은 성찰의 여정으로 인도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은, 내 삶의 연대기를 나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자비’라는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가는 영적인 회심의 과정입니다. 다윗이 내뱉은 “나는 누구이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라는 나지막한 물음은 지나온 날의 비천함을 한탄하거나 냉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베들레헴 들판의 거친 흙냄새와 사울을 피해 흐느끼던 동굴 속의 차가운 신음까지도 결국은 보석으로 빚어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가슴 벅찬 경외이자 항복이었습니다. 내 실력과 계산으로 치열하게 버텨온 줄 알았던 지난날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끝없는 참으심과 보이지 않는 손길이 나를 밀어 올린 은혜의 서사였음을 비로소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소란스러운 욕망과 나를 증명하고 싶은 세상적인 조급함을 잠재우고 주님 앞에 머물 때, 흩어져 있던 삶의 파편들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 바르게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더 채우기 위해 간구하는 자를 넘어, 이미 과분하게 부어진 은혜의 크기에 압도당하며 영혼의 가장 깊은 심연으로 침잠하는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듯 은혜의 심연에 잠긴 영혼이 도달하는 신앙의 최종적인 무게는, 결국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오래, 그리고 깊이 머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다윗이 읊조린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는 고백 안에는 타인에게 이해받으려 애쓰고 스스로를 설명하다 지친 영혼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도 눈물겨운 평안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의 위로는 결코 닿지 못하는 마음의 깊은 고독과 차마 기도로 토해내지 못한 신음까지도 주님은 이미 다 헤아리고 계신다는 그 신뢰가 우리를 다시 숨 쉬게 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입니다. 분주한 일상의 속도를 거스르고 은혜 앞에 잠잠히 앉는 이 머묾은, 단순히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격렬하게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영적 운동입니다. 사람의 평가에서 자유로워지고 하나님의 시간표에 발을 맞추는 이 고요한 사귐 속에서, 메말랐던 영혼은 비로소 하늘의 호흡을 시작하게 됩니다. 나를 끝내 놓지 않으시는 그 지극한 사랑 안에 영원한 뿌리를 내리며, 삶의 모든 순간을 찬송과 감사로 바꾸어 내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삶의 소음보다 하나님의 음성 앞에 더 오래 머무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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