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검은불꽃

20260528 [사무엘하 21:1-14]
2026-05-28 06:15:11
광주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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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불꽃 이미지.jpeg

멈춘 비 앞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사무엘하 21:14]


   하늘이 완전히 닫히고 대지가 바짝 갈라지는 기근이 찾아오면, 이상하게도 우리 영혼의 숨겨진 밑바닥이 날것 그대로 드러나곤 합니다. 한 해의 흉년은 남은 곡식을 세어보며 서로 위로하고 내년을 기약하며 버텨내지만, 두 해가 지나고 세 해가 되도록 하늘이 침묵하면 사람의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다윗 시대에 들이닥친 3년의 기근 역시 백성들에게는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고통이었을 텐데, 겉보기에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잔인한 자연재해 같았지만 사실 그 메마른 가뭄의 깊은 이면에는 오래전 인간이 저지르고 대충 덮어버린 ‘죄의 메아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월이 흐르면 상처도 희미해지고, 기억에서 잊히면 죄의 책임과 영적 부채도 자연스레 사라진다고 믿으며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는 세월의 두께로도 가릴 수 없는 기브온 사람들의 서글픈 억울함과, 미처 흐르지 못한 눈물이 수십 년 동안 그대로 고여 있었습니다. 살아가다 문득 찾아와 길어지는 인생의 메마른 시절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단순히 이 악물고 버텨내야 할 고통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으로 분주하게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오랜 시간 깊은 곳에 내팽개쳐 두었던 내면의 허물과 황폐함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라는 영혼의 아픈 초대일지도 모릅니다.

   상처를 도려내는 진실한 마주함이 있어야 비로소 곪았던 자리가 터지고 진짜 회복이 시작됩니다. 다윗은 왕으로서의 자존심이나 정치적 계산을 내려놓고, 자기 시대의 일이 아닌 전임 왕의 허물까지 외면하지 않은 채 공동체의 해묵은 상처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적당한 종교적 의식으로 때우려 하지 않고, 피 흐르는 역사와 깨어진 언약의 자리를 정면으로 마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처절한 직면의 한복판에는, 자식들의 시신 곁에 굵은 베를 펴고 거친 바위 위를 하루이틀도 아닌 몇 달 동안 묵묵히 지킨 여인 리스바의 외로운 침묵이 있었습니다. 리스바에게는 흐르는 세월을 되돌릴 힘도 없었고 왕의 정치를 뒤바꿀 권력도, 억울하게 죽은 자식들을 다시 살려낼 기적의 능력도 전혀 없었지만, 하늘에서 다시 비가 쏟아지기까지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 들짐승의 위협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우리는 흔히 대단한 승리를 거두거나 상황을 극적으로 뒤집는 것만 믿음이라 생각하지만, 진짜 깊은 믿음은 아무런 응답이 보이지 않고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 캄캄한 밤일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의 자리를 버텨내는 거룩한 머무름 그 자체에 있습니다.

   성경은 사울과 요나단의 뼈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와 흩어진 죽음들이 마땅한 제자리를 찾고, 그동안 철저히 외면당했던 슬픔이 공동체의 가슴 안으로 온전히 품어졌을 때 비로소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고 나직이 전합니다. 이 ‘그 후에야’라는 마침표가 주는 영적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뿌리를 그대로 둔 채 서둘러 눈앞의 가뭄만 면하게 하시는 임시방편의 평안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이 깨어지고 아프더라도 본질이 거룩하게 복원되는 참된 치유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내 간절함의 크기로 하나님을 달래어 비를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내 삶에 얽혀 있는 영적 매듭을 풀고 그분의 공의와 사랑 앞에 나를 굴복시키는 과정입니다. 지금 인생의 메마른 가뭄을 지나며 오래 기도해도 응답이 보이지 않고 마음이 심히 흔들리고 있다면, 어쩌면 내 기억 저편에 대충 덮어두었던 영혼의 허물과 외면하고 지낸 누군가의 눈물을 주님 앞에 정직하게 쏟아내야 할 때일지도 모릅니다. 리스바처럼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묵묵히 그 척박한 바위 위를 지켜낼 때, 오래 멈추어 있던 메마른 심령 위로 마침내 대지를 적시고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풍성하게 흘러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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