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하나님의 준비

 02  목포선교부 개설

 03  1대 배유지 목사와 광주선교부 개설

 04  선교 초기의 교회 명칭

 05  북문안교회

 06  광주나병원과 나환자교회

 07  오원 목사와 오원기념각

 08  2대 이기풍 목사

 09  배유지 목사의 마지막 10년

 10  4대째 이어오는 후손들

 11  금정교회

 12  서서평 선교사와 이일학교

 13  북문밖교회 분립

 14  3대 남궁혁 목사

 15  4대 김창국 목사

 16  양림교회 분립

 17  5대 최흥종 목사

 18  6대 김응규 목사

 19  7대 이경필 목사

 20  8대 성갑식 목사와 교회재건

 21  9대 정기환 목사와 남부교회

 22  10대 김재석 목사와 6.25전쟁

 23  광주제일교회

 24  11대 선재련 목사

 25  12대 천방욱 목사

 26  13대 한완석 목사

 27  14대 문성모 목사

 28  15대 백경홍 목사

 29  교회창립100주년 기념행사

 30  광주선교 2세기를 맞이하며

 1  하나님의 준비
광주제일교회를 설립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배유지 목사는 1868년 4월 11일 켄터키주에서 태어나 켄터키 리치몬드중앙대학(Center College, Danville, Ky.)과 켄터키신학교(Theological Seminary, Richmond, Ky.)를 졸업하고, 버지니아주의 연합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 Va.)를 졸업한 뒤, 다시 켄터키로 돌아와 켄터키루이빌장로회신학교(Louisville Seminary, Ky.)를 제1회로 졸업했다. 


그는 한국 선교사로 나오기 위해 1894년 6월26일 켄터키 리치몬드에서 위더스푼 양을 신부로 맞았는데, 신부의 아버지는 당대에 존경 받는 학자요 훌륭한 목회자였다.

배유지 목사의 루이빌노회 기록:
• 1893. 05. 16. 루이빌노회의 목사고시 합격 
• 1893. 11. 13. 한국 선교사로 임명 받음 
• 1894. 04. 18. 루이빌노회에서 목사 안수 받음 

배유지 목사는 목사안수를 받은 후 한국으로 출발하기까지 약 9개월간의 공백 기간이 있었다. 선교사 지망생은 교회를 담임할 수가 없었으므로 트로이(Troy), 헤브론(Hebron), 윌모어(Wilmore) 등 3개 도시에서 국비목회를 하였다.

배유지 목사 부부는 태평양연안열차에 몸을 싣고 1895년 2월 1일에 켄터키의 루이빌 역을 출발, 미 대륙을 횡단한 끝에 2월 7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2월 12일 오세아닉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항, 하와이-일본을 거쳐 4월 4일 부산항, 4월 6일 제물포항, 4월 9일(화)에 목적지인 서울에 도착했다.서울에 도착한 배유지 목사는 가난하고 미개한 서울 시민들을 발견하고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복음으로 이 민족을 개화시키고 빈곤에서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다. 한국의 풍습 등을 익히고 한국말 공부에 매진하는 동안 배유지 목사 부부는 러일전쟁의 종전, 단발령,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 등을 겪는다. 그들은 한국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사실들을 편지에 자세히 써서 각자 자기 쪽 식구들에게 보내면서, 그 모든 편지들을 사돈 간에 서로 바꾸어 읽은 후, 마지막에는 배유지 목사의 어머니가 다 모아서 한 통도 빠짐없이 보관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2  목포선교부 개설

한국에 먼저 들어와 있던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전략을 적용하여, 자신들보다 8년 늦게 들어온 남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전라도(충청도 일부 포함)와 제주도 지역의 선교를 맡도록 배정했다. 전주, 군산에는 이눌서(Rev. W. D. Reynolds) 목사, 최의덕(Rev. M. S. Tate) 목사, 전위렴(Rev. W. M. Junkin) 목사 등 남장로교 선교사 7인의 선발대가 이미 주재하고 있었다.

 

 

 

원래 배유지 목사는 전남의 행정 중심지이던 나주에 선교부를 개설하려고 하였으나, 주민들의 완고한 반대로 철수하여 목포에 선교부를 설치하게 되었었다. 1897년 3월 5일 배유지 목사의 어학선생인 변창연은 만복동(현 양동)에 장막을 치고 전남의 첫 교회인 '목포교회'를 시작하였다. 배유지 목사는 1898년 9월 11일에 목포선교부를 개설하고 목포교회를 자신의 임시사택으로 옮겼다. 동년 11월에는 오원 목사(Rev. Clement C. Owen)가 목포로 배정받아 오자 목포진료소를 개설하고 오원 의사에게 환자들을 진료케 했다. 1899년에는 스트레퍼(Miss Fredrica Elizabeth Straeffer) 양이 목포로 배정 받아 오고 1900년에는 의사인 파이팅(Miss Georgiana Whiting, M.D.) 양이 오원 목사와 결혼하여 목포로 오게 됨으로써 목포선교부는 활력이 넘치게 되었다.

 

 

 


배유지 목사 부인을 잃다

목포교회가 1900년 10월 예배당 신축과 함께 '목포양동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일취월장하던 1901년 4월12일, 전주에 출장 중이던 배유지 목사는 청천병력 같은 비보를 접한다. 부인 로티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때 부인의 나이 32세였고, 그들 사이에는 서울에서 태어난 5살짜리 아들 헨리(Henry)와 목포에서 태어난 2살짜리 딸 샬롯(Charlotte)이 있었다.

 

 

 

비통함 속에 부인의 시신을 서울 양화진의 외국인 묘역에 묻은 배유지 목사는 두 남매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목포양동교회는 1902년 4월 1일 예배당을 증축하고 교회 이름을 고인이 된 로티의 이름을 따서 '로티위더스푼벨기념교회'라고 지었다.

 

 

 

두 남매를 미혼의 여동생에게 맡기고, 1902년 가을에 배유지 목사는 목포로 돌아왔다. 그리고 신병치료차 귀국했던 오원 목사 부부도 배유지 목사와 함께 목포로 돌아오고, 변요한 목사 부부가 목포로 증파되어 오자, 일시 문을 닫았던 목포선교부는 곧 정상을 되찾았다. 이에 배유지 목사는 다시 힘을 얻어 1903년 9월 9일 영흥학교를 설립하고, 9월 15일에는 스트레퍼 양에게 정명여학교를 시작하게 하였다.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회는 1904년 3월 광주에 새로운 선교부 설치를 결정하고 배유지 목사에게 책임을 맡겼다. 배유지 목사는 1904년 4월 김윤수 씨 내외를 광주로 보내 사택을 건축하게 했다. 배유지 목사의 지시를 받은 김윤수 씨는 방림리에 거처를 정하고 선교사들의 집터를 물색하던 중 효천면 양림리 언덕배기의 '버려진 땅' 45에이커(약 5만6천 평)를 단돈 2,000달러에 사들였다. 이곳은 '애장터'였다. 즉, 어린아이들이 죽으면 시체를 땅에 묻지 않고 나무 위에 걸어 놓는 '풍장'의 현장이었던 것이다.그래서 어른들도 가까이 가기를 꺼려하는 곳이었다. 선교사들은 양림리는 물론 인근 봉선리와 방림리의 땅까지 사들여, 1926년 당시 광주 선교부의 소유 토지는 임야를 포함하여 모두 10만여 평에 달하였다. 김윤수 씨는 경치 좋은 양림리 언덕 위에 배유지 목사와 오원 목사가 거처할 임시 주택 두 채를 12월 중순에 완공하였다. 김윤수 씨는 원산 태생으로 목포에서 총순(總巡)을 지냈는데, 어머니가 손에 가시가 박혀 오원 의사의 치료를 받게 되면서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았으며, 광주 선교부의 사택 건축을 담당하면서 배유지 선교사의 동역자가 되었다.

 

 

 3  1대 배유지 목사와 광주선교부 개설

1904년에 재혼을 위해 4개월 휴가로 미국에 간 배유지 목사는 1904년 5월 10일 버지니아 주 노포크(Norfolk, Va.) 출신 불 양(Miss Margaret W. Bull)과 재혼하고 8월에 목포로 돌아왔다.배유지 목사와 오원 목사 일행은 1904년 12월 20일 광주로 이사를 완료하였다. 사택을 지을 때부터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던 광주선교부 동산에 외국인들이 이사를 왔으니 구경꾼들이 줄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배유지 목사는 광주로 이사한 후에 미국 시카고에서 선적했던 12상자나 되는 포장 짐을 받았다. 이삿짐 정리와 사생활을 위해서도 선교사들은 '구경 시간'을 정해야 했다.

 

 

 

광주제일교회의 시작

이사 와서 처음 맞는 주일이 공교롭게도 12월 25일이어서 성탄절과 겹쳤었다. 성탄절 축하예배를 11시에 드린다고 구경꾼들에게 알렸음은 물론이다.11시가 되어 구경꾼들은 몰려 왔고 배유지 목사는 미닫이 문턱을 딛고 서서, 두 방과 현관, 마당에까지 가득 찬 남녀 '구경꾼'들에게, "땅에는 평화, 사람에겐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배유지 목사의 부인 마가렛은 이날 예배에 참석한 사람이 200명에 가까웠다고 했다. 바로 이 성탄절예배가 광주 최초의 예배였으며, 동시에 광주제일교회의 시작이었다.

 

 

 

광주에서 두 번째로 맞는 주일이 1905년 1월 1일이었는데 모여드는 구경꾼들의 얼굴은 바뀌어도 숫자는 줄지 않아서 배유지 목사의 임시 사택은 그들을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유지 목사는 '구경꾼 선교'에 착안하여 '보여주는 일'에 정성을 기울였고, 그럴수록 예배 장소가 당장의 과제로 떠올랐다. 선교인력도 절대부족이었다. 당초에 배유지 목사는 반경 20리까지의 도심을 맡아 선교하면서 그 중앙에 큰 교회를 짓는 것이 목표였으나, 인력이 워낙 부족한 형편이어서 그는 곡성, 옥과, 창평, 담양, 순창, 고창, 무장, 영광, 무안군 지도면까지 선교구역으로 맡아야만 했다.목포에서 전도의 경험을 쌓은 배유지 목사는 가정방문을 시작으로, 장터와 거리에서, 그리고 기도회와 주일예배에서, 주민들에게 1905년 한 해에만 1만장이 넘는 책자와 달력을 나누어주었고, 100권의 신약성경과 150권의 찬송가책을 팔았다고 적고 있다.1905년 5월부터 짓기 시작한 벨 목사의 영구사택이 그해 11월 초에 완공되어 벨 목사 가족이 영구사택으로 이사하자 벨 목사는 헛간(cottage)을 진료소로 개조하여 1905년 11월 20일에 진료소(현, 광주기독병원)의 문을 열고 놀란 박사(Joseph Wynne Nolan)를 소장으로 임명했다.1905년 11월에 20일에는 임시사택 건물에 진료소(현, 광주기독병원)를 개설하고 놀란(Joseph Wynne Nolan)의 소장으로 임명했다. 진료소는 선교의 전진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선교의 전진기지 진료소

놀란에 이어 제2대 병원장에 취임한 우일선(Robert Manton Wilson, 禹一善, 禹越遜, 禹越淳) 선교사는 10여년이 지난 뒤에도 "광주병원이 초만원이다.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은 거의 모두 신자가 된다."며 복음 전도를 위해서도 병원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우일선 선교사는 1911년에 미국의 그레이엄 장로가 자기의 죽은 딸을 기념하여 거금을 기부하자 병원을 크게 건축하고 병원 이름을 '그레이엄기념병원'이라 하였다.

 

 

 

우일선 원장은 또 제중병원에 치과를 개설하였으며, 폐결핵환자요양소도 설치해 결핵예방에도 공헌하였다.광주선교부는 구경꾼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날로 성장하였다. 오원 부인에 의하면 광주선교부가 개설된 지 두 달 정도 지난 1905년 2월 12일 주일에 배유지 목사가 부재중이어서, 그 날 주일예배를 자기 집에서 드렸는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 1/4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는 주일 집회수가 250여명에 달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배유지 목사도 같은 보고를 하고 있다.

 

"우리는 1년 전에 광주로 옮겨와서 새롭게 시작했다. 지난주일 아침 예배에는 250 명가량이 출석했다."

 

 4  선교 초기의 교회 명칭

이제 여기서 우리는 잠깐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다. 당시의 광주 사람들은 '교회'를 무엇이라고 불렀을까?우선 선교사들은 어떻게 불렀는지 살펴보자.

 

1. The Kwangju church 

2. the church 

3. The local church 

4. the Kwangju local church 

5. The city church 

6. The station church 

7. The Kwangju City Church 

 

대표적인 것 몇 개만 예시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15년까지도 선교사들은 그냥 지역의 이름을 따서 'Kwangju church'라고 소문자로 적었다.

 

 

 

예배당이 광주에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이런 표기는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부에도 잘 이해되었다. Kwangju와 church 사이에 local, mission, station, city 등을 넣어 쓰기도 하였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교회를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1. 광쥬교회 

2. 광쥬부당회 

3. 광쥬당회 

4. 광쥬읍당회 

5. 광쥬북문안당회 

 

위의 명칭들은 '전라노회록'에 나타난 것들 중 일부이다. 보는 바와 같이 교회 이름이 다양한 듯하나, 분석해 보면 모든 이름이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광주지역에 지어진 '광주교회'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 ~ 당회'라는 명칭은 당시 '당회장'이 있는 교회에 붙였다. 당회장이 떠나면 다시 ' ~ 교회'로 격하(?)되었다. 교회 이름이 오늘날처럼 고유명사로 쓰이게 된 것은 제6회 전라노회에서였다. 배유지 목사가 건강상의 이유로 북문안교회의 당회장직을 사임하고 한국인인 이기풍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빙하면서 그 청빙문서에서 비로소 '광주북문안교회'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의미로 광주에서 쓰인 최초의 교회 이름이며, 또한 광주제일교회의 첫 공식 명칭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 둘 것은, 그때 이후 우리 한국 사람들은 모든 공식문서에서 '북문안교회', 혹은 '北門內敎會'로 적고 있는데 반해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그냥 'North Gate Church'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문 명칭이 문제가 되는 것을 우리는 뒤에 가서 만나게 될 것이다.

 

 5  북문안교회

배유지 목사의 과제 중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선교 중심지에 central church를 짓는 것이었다. 광주의 4대문 안에 예배당 지을만한 곳을 물색하던 중 한국인 기독교인들이 예배당 신축 부지를 정부로부터 빌리는데 성공하였다. 원래는 사창(社倉)터였는데, 서류상 '정부 소유'로 된 노는 땅이었다. 부지가 확보되자 건축헌금에 대한 열의가 탄력을 받게 되었고, 배유지 목사의 선교정신이기도 했던 "스스로 해내자"는 뜻이 주위에 잘 전달되어 교인들이 건축헌금으로 거금 40달러를 모았고 선교사들도 교인으로서 80달러를 헌금하여, 1906년 6월 북문 안에 50평의 ㄱ자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니, 이것이 광주에 지어진 최초의 예배당이었다.

 

 

 

 

확장주일학교

배유지 목사가 이끄는 광주선교부는 광주북문안예배당 건축을 계기로 확장주일학교 운동에 박차를 가해 이 지역의 교세가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확장주일학교 운동은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교육열을 불러일으켰고, 김윤수 집사는 두 딸의 교육을 위해 배유지 목사에게 여학교를 시작해달라고 호소하여 결국 배유지 목사는 1908년 4월 1일에 여학교(현, 수피아여중고)를 개교하였고 초대 교장으로 엄언라(Miss Ella Graham)선교사를 임명하였다. 우일선 선교사에 의하면 1925년 8월에 광주에는 5개의 교회가 있었고 55개의 확장주일학교가 있어서 거기에 출석하는 주일학생 수가 약 3,000명이었다. 주일에는 '버스'가 60명의 교사들을 실어 나르고 소형차도 소수의 교사들을 실어 날랐다. 이렇다 보니 선교사들 스스로도 확장주일학교 운동은 광주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다고 생각했다. 유년주일학교이건 장년주일학교이건 주일학교는 이 당시에 가장 안정적인 인력 공급원이었다.

 

"이 작은 주일학교들이 우리학교(숭일, 수피아)와 병원에 학생과 환자들을 보내주고, 또 (주일학교는) 이 기관들(숭일, 수피아, 제중병원)이 필요로 하는 좋은 인력공급원이 된다."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우리 한국교회가 파송한 오늘의 해외 선교사들도 오대양 육대주에서 예외 없이 주일학교를 시작하는 것으로써 선교의 첫 발을 내딛고 있음을 우리는 듣고 있다. 주일학교야말로 교회 인력자원의 요람이며, 주일학생이야말로 교회의 묘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6  광주나병원과 나환자교회

1909년 오원 목사를 치료해달라는 우일선 원장의 요청을 받고 목포에서 광주로 오던 포사이드(W. H. Forsythe) 선교사는 집에서 쫓겨난 여성 나환자를 길에서 발견하고 제중병원으로 데려왔으나, 제중병원에도 천형(天刑)의 나환자를 수용할 공간은 없었다. 그래서 봉선리의 가마터에다 우선 수용하고 열심히 치료했으나 얼마 후 그녀는 죽고 말았다.

 

 

 

그녀가 죽은 후 광주 선교사들이 성금을 내서 방 3개짜리 건물을 지어 나환자 5 ~ 6명을 수용하였다.

 

 

 

나환자를 치료해준다는 소문을 들은 환자들이 하나 둘 광주로 모여들었다. 우일선 선교사는 조수 최흥종 집사의 도움을 얻어 1911년 4월 25일 전남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 작은 집을 짓고 나환자 10여 명을 수용하였는데, 이것이 '광주나병원'이었다. 이윽고 나환자들이 대거 광주로 몰려왔고,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 우일선 선교사의 복음을 잘도 받아들였다. 마침내 그들끼리만 모여서 예배드릴 공간이 필요하게 되자 1912년에 나환자(봉선리)교회를 설립하였다. 아래의 사진을 촬영할 당시에는 매 주일 430명의 나환자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광주나환자 수용소에는 600여명의 환자들이 수용되기도 했다. 1915년에는 미감아 교육을 위해 봉선리국민학교를 설립하여 초등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1971년에 폐교되었다.

 

 

 

1925년 광주나병원은 현재의 위치인 여천군 율촌면 여수 부근의 해안에 15만평의 부지를 매입하여 교회와 병사(病舍)들을 마련하고 1925년부터 2년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전하였다.

 

 

 

1926년 비더울프나병원으로 불렀는데 한때는 재원자가 749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1935년 3월 15일 '여수애양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대적 '나환자요양소'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결국, 최흥종 목사가 나주 삼포에 설립한 나환자 자활촌인 '호혜원'과 '여수애양원'으로 광주의 나환자들이 모두 분산 수용되면서 봉선리 나환자교회는 광주나병원과 함께 문을 닫았다.

 

 

 7  오원 목사와 오원기념각

의사요 목사인 오원 선교사는 1867년 7월 19일 미국 남부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나, 햄든 시드니대학, 스코틀랜드 뉴대학, 유니온신학교, 버지니아대학교 등에서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고 1894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1897년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8년 11월 5일에 한국에 입국하여 1900년 12월 12일에 북장로교 소속의 여의사요 선교사인 화이팅(Georgiana Whiting) 양과 서울의 언더우드 목사 사택에서 결혼하였다. 그 후 목포로, 광주로 배유지 목사와 팀을 이루며 전남 선교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는 광주와 전남의 동남부 지방인 나주, 영암, 장흥, 보성, 능주, 화순, 낙안, 순천, 광양, 구례군 등지를 맡아 거의 모든 시간을 순회전도에 바쳤다. 목포에서는 진료소를 개설하고 환자 진료에 전념하여 김윤수라는 큰 인물을 개종시켰었다. 그런데 광주로 와서는 의료사업보다도 목사로서의 임무에 더 몰두하였다. 그것은 선교부의 결정도 있었지만 성경 가르치는 일이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1909년 2월 27일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그의 성경공부반에는 200명가량이 모여들었다. 학생들 중에는 90리, 120리나 되는 먼 곳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다. 성경공부반은 보통 10일간씩 계속되었는데, 밤이 되면 3평도 안 되는 방에서 17명씩 합숙해야 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불편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할아버지를 기념하는 성경공부회관(Bible Hall)을 건축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동생과 숙부에게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한 때는 할아버지를 기념하는 '병원'을 지으려고 했었지만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 그는 건물의 용도로 강당(또는 예배당)과 강의실, 그리고 지하에는 남자 숙소를 두고 싶어 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오원 목사는 남자 반을 가르치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여자 반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내의 여자반도 평균 100명이 출석했다. 오 원 목사는 이 편지가 유언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장흥지방 교회들을 순회 전도하던 중 발병하여 3일 만에 광주 제중병원에 도착하였으나 한 달여 만인 1909년 4월 3일 급성폐렴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오 원 목사의 별세 소식을 들은 한국인들은 40km, 혹은 80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문상을 하러왔다. 오 원 목사의 소원은 사후에 달성되었다. 미국의 가족들과 친척들이 필요한 기금을 마련해서 그의 계획을 실현시킨 것이다. 오원기념각은 서로득 선교사에 의해 건축되었다. 서로득은 설계사로 평신도(장로) 선교사였다.

 

 

 

서로득 선교사는 오원기념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 건물은 가로 세로 60x60 피트의 사각형이고, 2층에는 15피트 넓이의 발코니가 양쪽으로 쭉 뻗어있다. 한국인 1,500명의 수용이 가능하고,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칸막이 시설이 있어서 강당을 10개의 교실로 나눌 수가 있다. 건축비는 아궁이와 지하층 설비를 포함해서 4,200달러가 들었다." 

 

오원기념각의 건축시기는 도대선(Rev. S. K. Dodson) 목사의 글에서 판단하건데 1915년 1월로 짐작된다. 또 이 오원기념각은 '기념각교회'로 불릴 만큼 자주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북문안교회가 남문 밖 금정 101번지로 예배당 건물을 뜯어 옮길 때 6개월 간 북문안교회 교인들은 이 기념각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양림교회들이 분열될 때, 즉, 1953년 기장과 예장이 분열될 때, 그리고 1959년에는 예장이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될 때 각각 분열되어 나온 교인들이 새로운 예배당을 지을 때까지 2 ~ 3년씩 이 오원기념각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1950년대와 60년대 초까지 거의 예배당으로 쓰이게 됨으로써 '기념각교회'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이었다.

 

 

 

 

 8  2대 이기풍 목사

이기풍 목사는 1868년 11월 21일 평양 동대문 밖에서 태어났다. 그는 6세 때 사서오경을 외웠고, 12세 때는 백일장에서 붓글씨로 장원이 되었다. 그는 평양 서문통 네거리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던 마포삼열 목사(Rev. 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에게 돌을 던져 턱에 커다란 흉터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은 소안론 선교사였다. 청일전쟁을 피해 원산으로 간 이기풍이 길에서 전도하는 그를 만났고, 이기풍은 마포삼열과 외모가 비슷해 보이는 그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1894년에 소안론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곧 권서인(勸書人)이 되고, 조사(助事)가 되고, 마침내는 목사(牧師)가 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1903년 한국 최초로 설립된 평양신학교 신입생 7명 중 한 명으로 입학하여, 1907년 9월 17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졸업식 당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독노회'가 조직되었고, 이 창립(제1회)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한국장로교 최초 7명의 목사 중 한 분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독노회'는 제주도 선교사로 이기풍 목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한국교회는 일곱 분밖에 안 되는 목사 중에서 한 분을 외지 선교사로 내어놓은 것이었다. 그것은 독노회를 조직한 한국교회의 기쁨의 표시였고, 또한 선교사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감사의 표현이었다.

 

 

 

그는 1907년 늦가을에 제물포항을 출발하였으나 그 이듬해인 1908년 봄에야 천신만고 끝에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제주도 선교는 사투였다.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고, '제주도 교난'(濟州道 敎難, 1901년)으로 서양 종교에 대한 반감이 깊어서, 숙소도 얻지 못하여 밤이 되면 마구간에서 자고, 물과 칡으로 연명하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영양실조로 모래사장에 쓰러져 있는 그를 한 해녀가 구조하였고, 그 해녀는 제주도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제주도에는 오늘날 330여 교회에 4만여 성도가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맺은 열매인 것이다. 이기풍 선교사는 제주도에서 이렇게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선교하다가 성대에 이상이 생겨 1915년 노회로부터 병가를 얻고, 육지에 나와 1년간 휴식 겸 치료를 받았다. 사실은 배유지 목사가 이기풍 목사를 후임으로 내심 정해놓고 육지로 나올 것을 간곡히 요청하기도 했었다. 그의 성대가 많이 호전되자 광주북문안교회는 1916년 8월 28일 이기풍 목사를 제2대 위임목사로 청빙하였다. 이기풍 목사가 부임함으로써 비로소 광주북문안교회는 완전한 당회가 조직되었다.

 

당회(堂會)의 탄생

제6회 전라노회는 "죠션 목사와 죠션 장로"가 있는 교회를 '완젼한 당회'라고 규정하고, 당회록 식양위원(式樣委員)에게 '당회록'과 '교회록'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를 연구하도록 위임하였다. 따라서 이때까지의 '당회록'은 오늘날의 '공동의회록'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선교사가 전 교인을 모아놓고 회의를 할 때 그 회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 '예배당'의 당자와 결합된 '당회록'이었던 것이다. 한자로는 물론 똑 같다. 광주북문안교회는 이미 1912년에 장립 받은 김윤수, 최흥종 장로와 1916년 6월에 장립 받은 이득주, 남궁혁 장로 등 네 분의 장로가 시무 중이었으므로 '완전한 당회'가 성립되어, 이때부터 '당회록'과 '교회록'을 노회가 만든 양식에 의해 따로따로 기록해야 했다. 그 당회록과 교회록이 1924년 양림교회 분립당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기풍 목사를 모시고 심기일전한 광주북문안교회는 크게 부흥하여 장년주일학교에 400여명, 유년주일학교에 200여명의 학생이 출석하였다. 당시에는 주일예배를 드리기 전에 주일학교 공과공부를 먼저 했었다. 그리고 모든 교인들은 주일학교 공과공부를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주일예배의 출석인원은 400명이 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타고난 열정의 목회자인 이기풍 목사의 헌신적인 목회 덕택에 교회는 날로 부흥하였으나, 초대교회의 과중한 목회 업무는 또다시 1918년 7월 6일 이기풍 목사의 "성음이 부족함으로, 목사 이기풍에 대하여는 목사가족구조부에 위탁하여 휴양하도록 구조케 하기를 결정하고, 광주북문내교회 임시 당회장은 배유지로 선정하였다." 

 

3·1운동과 북문안교회

목자 잃은 광주북문안교회는 다행히도 응집력이 필요한 시대를 만났다. 일본은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과 계몽 운동가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마침 고종황제의 국장(國葬)이 3월3일(月)로 잡히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일 것을 예상한 기독교, 천도교, 불교 지도자들이 3월 1일(토)을 독립만세 운동의 날로 정하였다. 이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졌고, 광주에서는 당연히 북문안교회의 개화된 교인들이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결국 최흥종 장로를 비롯하여 김강, 김철, 최병준, 이윤호, 황상호, 주형옥, 김철주, 송광춘, 정두범, 최영균, 박애순, 홍승애 등등의 교인들이 옥고를 치렀다. "3?1 獨立運動 光州地方法院 判決文"에 의하면 일제는 보안법(保安法)을 적용하여 박애순에게 징역 1년 6개월, 김철주에게 징역 10월을 선고하였다. 광주북문안교회가 광주지역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되자 일제는 토지수용령으로 '총독부 소유'로 만들어버린 '교회 터'를 환수하고 예배당을 봉쇄해버렸다. 이에 교인들은 북문 안의 ㄱ자 예배당을 뜯어다가 남문 밖의 금정(錦町) 101번지에 옮겨짓고 1919년 가을에 입당한 후 예배당 이름을 '금정교회'로 바꿨다. 그러나 당시에는 서울의 '새문안교회', 전주의 '서문밖교회', 대구의 '남문안교회'처럼, 도시의 큰 교회들이 4대문 안이나 밖에 예배당을 짓고 예배당 이름을「...문안교회」또는「...문밖교회」로 부르는 것이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금정교회'도 주로 불신자들 세계에서는 '남문밖교회'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전남노회에 등록한 공식 명칭은 '금정교회(錦町敎會)'였다.

 

 

 9  배유지 목사의 마지막 10년

광주시와 전라남도의 북서부 지역에 50여개의 교회들을 개척 설립하고 관리해온 배유지 목사는 이제 한국선교의 첫 열매인 한국인 목사에게 교회를 맡기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선교사로서의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었다. 그는 이기풍 목사에게 광주북문안교회를 맡기고 1년간의 병가를 얻어 1917년 7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1918년 3월 광주로 돌아와 북문안교회의 임시당회장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1919년 3월 26일, "3·1운동을 암암리에 돕기 위해" 미국대사관에서 열린 '미국선교사회의'에 참석하고 미국 해외선교본부에서 보내준 새 자동차를 몰고 광주로 돌아오던 길에, 수원 병점 철도건널목에서 기차와 충돌하여 부인 마가렛과 구례인(Paul S. Crane) 선교사가 현장에서 사망하고, 조수석에 탔던 노라복(Robert Knox) 선교사는 오른 쪽 눈을 실명하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때 마가렛의 나이 46세였다. 마가렛은 세 자녀를 낳았으나, 둘째는 어려서 잃고 두 아들을 남겼는데, 배유지 목사는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부인을 안장한 뒤, 두 아들을 데리고 영구 귀국하는 심정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국에서 몸과 마음의 아픔을 치료하며 여생을 보내려 했던 배유지 목사는 휴식은커녕 오히려 바쁘게 지내야만 했다. 귀국하자마자 모교인 중앙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켄터키교회연합대회는 1919년 회기의 대회장으로 그를 선출하여 주님의 일을 계속하게 했다. 두 번씩이나 상처한 배유지 목사에게 그 아픔을 잊게 하려는 고향 사람들의 배려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배유지 목사는 주위의 권유로 1921년 9월 14일 줄리아 다이사트(Julia Dysart, 裵主里亞) 양과 버지니아 주 샬로트빌에서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결혼 6개월 만인 1922년 3월 9일 부인과 함께 다시 제2의 고향인 광주로 돌아왔다. 줄리아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줄리아는 사범학교 출신이어서 광주이일양성학교 교사와 교장을 역임하였고, 배유지 목사는 1907년 이래 봉직해온 1년에 3학기제로 운영되는 평양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돌아가 한국교회의 지도자 양성에 마지막 힘을 쏟았다. 그러나 배유지 목사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중국 북경의 록펠러병원에 입원 중이던 1925년 초에 마비 증세를 보였었고, 6월에는 증세가 악화되어 반신불수가 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광주의 집으로 돌아와 1925년 9월 2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광주시 양림동 선교사 묘역의 둘째 부인 곁에 묻혔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1921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남장로회의 헌금으로 지어졌는데 헌금의 상당부분을 기부했던 코넬리아 커티스 여사을 이름을 따서 커티스 메모리얼홀로 명명되었다. 1955년 선교사들이 회의를 거쳐 예배당 이름을 '호남선교의 아버지'라 일컫는 배유지 목사를 기리기 위해 '배유지 기념 예배당(The Bell Memorial Chapel)'으로 바꾸었다. 지금은 예수피아교회로 불리고 있다. 이 건물은 2층 건물로 위층은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예배당으로 이용하였고, 아래층은 선교부 아동들의 학교로 쓰였다. 건물 내부가 중앙을 기점으로 조화롭게 배치되었으며 규모는 작지만 장식적인 요소가 많아 건축술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배유지 박사는 

 

1. 목포와 광주에 최초로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2. 최초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3. 최초의 남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래서 광주 전남의 근대화를 이룩한 선교의 아버지이다. 

4. 1907년~1923년까지 평양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서 유니언신학교의 보수신학을 한국 신학에 심어주었다. 

5.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을 역임하면서 교회의 조직과 행정의 확고한 틀을 구축해 주었다. 

5. 배유지 선교사는 이 지역에 개신교의 인프라를 굳건히 다져준 잊어서는 안 될 은인이다.

 

 

 10  4대째 이어오는 후손들

여기서 우리는 잠깐 곁으로 나가, 1901년 그녀의 나이 2살에 어머니를 잃었던 샬롯의 그 후 생애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아버지의 팔에 안겨 부모의 나라로 돌아간 남매는 미혼의 고모 손에 맡겨졌다. 샬롯은 성장하여 교사가 되었는데, 결국 그녀도 한국선교사로 자원하여 선배 선교사와 결혼하였다. 신랑 인돈(William Alderman Linton) 선교사는 조지아 주 토머스빌 출신으로 조지아공대 전기공학과를 수석 졸업한 평신도 선교사였다. 인돈 선교사는 이미 1912년 9월 20일 목포항에 선교의 첫 발을 내딛고, 군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19년에 1차 안식년을 맞아 교육학을 공부할 목적으로 귀국하여, 1921년 6월에 컬럼비아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결혼하였다. 1922년 6월 10일 일본 고베에서 24세의 샬롯은 아버지 배유지 목사와 오빠 헨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친척인 로간(Rev. Chas A. Logan) 목사의 주례로 32세의 인돈과 결혼식을 올렸다. 배유지 목사의 사위가 된 인돈 선교사는 전북과 충남 지방에서 교육 선교 사역에 몸을 바쳤다. 군산 영명학교의 성경 및 영어 교사와 교장을 역임하였고, 전주 신흥학교 교장과 기전여학교 교장을 역임했으며, 대전에 대전대학(현, 한남대학교)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부인 샬롯도 기전여학교 제7대 교장을 역임함으로써 한국의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한 2세 선교사가 되었다. 인돈 선교사 부부는 아들 넷을 낳았는데, 2남 인도아(Rev. Dwight Linton)와 3남 인휴(Rev. Hugh Linton)가 한국선교사로 나와, 인도아 목사는 주로 목포에서 선교하다가 광주의 호남신학교 교장을 역임한 뒤 귀국하여 지금 아틀란타 부근에 살고 있고, 인휴 선교사는 순천에서 결핵 퇴치사업을 하다가 1984년 교통사고로 숨져, 자신이 설립한 순천기독결핵재활원 경내에 안장되었다.

 

 

 

인휴 선교사 부부는 5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2남 인세반 (Steve W. Linton, Ph.D.) 박사는 컬럼비아대학교 교수직을 버리고 4대째 한국 선교사로 나와 현재 북한의 결핵퇴치 사업을 벌이고 있는 유진벨재단 의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고, 5남인 인요한(Dr. John Alderman Linton) 박사 역시 한국주재 의사 선교사로서 현재 연세의료원 외국인진료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두 형제는 모두 한국이 고향이며 한국 처녀와 결혼하였다.

 

 

 

 

 11  금정교회

이제 금정교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금정 101번지로 옮겨지은 ㄱ자형 금정교회는 북문안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남녀 교인이 자리를 따로 앉고, 가운데는 포장을 처서 서로 볼 수 없도록 했으며, 예배당 출입문도 당연히 두 개여서 남녀가 따로 출입을 했다. 그래서 예배 전 준비찬송을 부를 때면 남녀가 서로 지지 않으려고 소리를 크게 부르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금정교회 이득경 권사에 의하면 처음에는 지금의 전남대병원 뒤쪽에 터를 잡으려고 했으나 성 안에서 너무 멀고 외진 곳이어서, 남문 가까운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금정으로 옮겨온 뒤 교회는 참으로 어려웠다. 김윤수 장로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고, 최흥종 장로와 남궁혁 장로는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다수의 교인들이 투옥된 상태여서, 이득주 장로가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선교사들도 수효가 줄고 손이 모자라서 1920년 연례회의 때는 한 사람이 세 사람 몫을 담당해야 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선배가 시작한 교회, 자신들의 자랑인 금정교회이기에, 광주에 주재하는 선교사들은 서로 힘을 합해 지키고 키우면서, 확장주일학교 운동에 지속적인 노력을 경주했다. 그들은 이 확장주일학교들이 장차 조직교회로 성장할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12  서서평 선교사와 이일학교

서서평(Miss Elizabeth J. Shepping) 선교사는 1880년 9월26일 독일의 비스바덴에서 태어났다. 남편을 잃은 어머니가 서평의 나이 1살 때 미국으로 떠나버려서, 가톨릭교도인 할머니 손에 자라다가 9살에 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어머니를 만났다. 뉴욕고등학교를 졸업 후 뉴욕시립병원에서 간호학을 수학하고, 브루클린의 유대인병원 수간호사를 거쳐 유대인 결핵환자 요양소에 근무하면서 뉴욕 성서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에 졸업하였다. 남장로교 선교국에 한국 간호선교사를 지망하여 허락을 받고 한국을 향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난 것이 1912년 2월 20일이었다. 한국에 온 서서평은 광주 제중원, 군산 구암병원을 거쳐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겸 간호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3·1운동 때 피검된 사람들을 돕다가 신변에 위협을 느껴 1919년에 다시 광주로 내려와 금정교회에 출석 봉사하면서 제중병원 간호사, 간호부장을 역임하였다. 서서평 여사는 1922년 12월 한국 최초로 금정교회에서 부인조력회(현, 여전도회)를 조직, 그것을 전국으로 보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녀는 제중원 우일선 원장을 도와 광주나병원(현 여수애양원)의 어제와 오늘이 있게 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고, 불우한 여성들을 자기 집에 데려다가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으며, 한국간호부회(현 대한간호사회)를 조직하여 10년간 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간호부회를 세계간호부회에 가입시키려고 카나다와 일본을 왕래하는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 북캐롤라이나 주에 사는 친구 로이스 닐(Miss Lois Neel)의 재정지원으로 1923년 4월에는 양림동에 이일양성학교를 설립하여 당시 한국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전도부인을 다수 배출, 교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녀는 1명의 아들과 13명의 불우한 소녀들을 자신의 딸로 입양 양육하여 기독교 가정을 이루게 하였다. 이일학교 뜰에 세워졌던 '서서평선교20주년기념비'는 광주 이일양성학교와 전주 한예정양성학교가 통합하여 한일장신대학교로 태어나면서 한일장신대 교정으로 옮겨졌다.

 

 

 

서서평 선교사는 독신 간호사로서 결핵환자, 나병환자, 빈민들을 돌보고, 여권신장을 위해 교육, 선교, 봉사에 혼신의 힘을 다하다가 1934년 6월 26일 별세하였다. 그녀의 장례는 양림동 오원기념각에서 광주사회장으로 거행되었고 그녀의 시신은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평소 월급의 반은 헌금하고 반은 장학금과 구제비로 썼던 그녀의 집에는 밀가루 두 홉 외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고 그녀는 시신마저도 병원에 기증하여 의학연구에 써달라고 유언했다. 금정교회는 그녀의 묘지에 묘비를 세워서 그녀의 믿음과 업적을 기리고 있다. 당시 금정교회는 15원을 들여 그녀의 묘비를 건립하였다.

 

 

 13  북문밖교회 분립

북문안교회가 남문 밖으로 옮겨오자 문제가 생겼다. 북문 밖의 교인들이 이제는 북문 의 정 반대 쪽에 있는 남문 밖까지 밤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은 무리였다. 가로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암흑 속을 더듬어가는 '머나먼 길'이었다. 북문안교회는 북문 밖 교인들을 위해 이미 1917년부터 북문 밖에 초가집을 사서 기도처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에 금정교회는 제6회 전남노회의 허락을 받아 1920년 9월 4일 '북문밖교회'를 분립하였다.

광주중앙교회의 요람을 보면 맨 첫 줄에,

 

"1917년 1월 31일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에서 분립하여 북문밖교회(일명 종예배당)로 설립."

 

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북문 밖에 사는 교우들이 기도처를 운영한 것이 1917년 1월 31(水)부터였고 1917년에는 어머니교회가 아직도 북문 안에 있었으니 서술 상 잘못이 없다.

제7회 전남노회는 1921년 1월 28일,

 

신학준사 최흥종을 강도사로 인허하고, 광주 북문외교회에서 최흥종을 선교사 노라복과 동사위임목사로 청빙하므로 허하기로 결정하다."

 

 

 

광주에 두 번째 교회가 탄생하는 것은 선교사들에게나 한국 신자들에게나 대 경사였다. 우일선 선교사가 그것을 전하고 있다. 우일선 선교사는 북문밖교회가 분립된 날이 주일이어서 원래 빨강색 글씨로 된 날이지만, 교회를 하나 분립한 날이기 때문에 이중으로 빨강색 날이라고 감격해 했다. 북문외교회는 초가 한옥을 리모델링하여 1921년 7월 3일 헌당식을 거행하였고, 1925년 가을노회에서 교회 이름을 '광주중앙교회'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문밖교회를 분립할 당시 금정교회는 600여명이 출석하고 있었는데, 교인의 거의 반수가 중앙교회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래 글을 보면 금정교회는 북문밖교회를 분립한 후 1년도 못되어 다시 대형교회로 부흥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local church(금정교회)는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와서 현재 두 개의 대형 교회 집회수가 1,000명이 넘고, 이 두 교회가 25개의 (확장)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주일학생 수가 1,600명이 넘는다."

 

 

 14  3대 남궁혁 목사

남궁혁 목사는 1882년 7월 1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배재학당 출신으로 목포세관에 근무하면서 목포교회를 출석하고 있었는데, 선교사들의 중매로 황해도 솔내(松川)의 명문 출신인 김함라 (金涵羅)를 만나게 되었고 1908년 게일(J. S. Gale)선교사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선교사들은 목포 영흥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그를 광주 숭일학교로 옮기게 했다. 그는 광주숭일학교 영어교사를 하면서 북문안교회에 출석하여 1916년에 이득주와 함께 북문안교회의 제2대 장로로 임직하였다. 선교사들의 권유로 1919년 평양신학교에 진학하게 된 그는 졸업과 동시에 목사안수를 받고 1921년 6월 29일 금정교회 제3대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남궁혁 목사는 금정교회 시무 중이던 1922년 초에 The Missionary Survey지에 김강 장로, 홍우종 장로와 함께 3인 공동명의로 영문서한을 보내, 선교사들이 조국과 부모형제 및 친구들을 버리고 한국에 와서 물질적, 영적으로 한국을 도와주는 것을 감사하고, 선교사들을 더 보내주기를 요청했다. 선교사들은 남궁 목사의 잠재성을 발견하고, 그를 평양신학교 교수로 채용하기 위해 미국유학을 적극 권했다. 그래서 남궁혁 목사는 금정교회를 500여명이 모이는 대 교회로 부흥시켜 놓은 뒤, 1922년 4월 20일 금정교회를 사임하였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추천으로 장학금을 받고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한 남궁혁 목사는 선교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2년 만에 신학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계속 공부하여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1925년 귀국하여 한국인 최초의 평양신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교수로 재직하면서 1932년 평양노회장에 피선되고, 그해에 또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1회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남궁혁 박사는 영어, 일어, 중국어 등 4개 국어에 능통하여 19 22년 북캐롤라이나주 몬트리트(Montreat)선교사 여름대회에서 연설을 하는 등, 선교사들로부터 장차 한국교회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6?25 동란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8월 23일 그의 집에서 인민군들에게 체포되어 강제 납북되고 말았다. 그는 평양의 어느 감호소에 감금생활 중 북한 정치보위부로부터 기독교 대표로 남한을 향해 방송을 하면 자유를 주겠다는 유혹을 받았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금식기도를 계속하다가 기운이 다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15  4대 김창국 목사

금정교회는 남궁혁 목사가 사임한 당일인 1922년 4월 20일 전남노회에 제주성내교회에 시무하는 김창국 목사를 금정교회 제4대 위임목사로 청빙하였다.

 

 

 

김창국 목사는 1884년 1월 28일 전주에서 태어나 1897년 이눌서 선교사로부터 전주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5명 중 한 사람이었으며, 1900년에 하위렴(W. B. Harrison) 선교사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한 소년을 대상으로 근대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전주 신흥학교의 시작이었고, 그 소년이 바로 김창국이었다. 그는 신흥학교와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잠시 하다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16  양림교회 분립

김창국 목사가 당회장으로 부임한 1922년의 금정교회는 아직도 북문밖 교인들을 내보낸 '분립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부임 2년만인 1924년 '양림구역'에 사는 교우들이 '양림교회' 분립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유는 충분했다. 캄캄한 밤에 교회까지 먼 길을 가기가 쉽지 않았고, 비가 와서 광주천이 범람하면 예배에 참석하는 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양림정(楊林町)에는 제중병원 직원, 숭일학교 학생과 직원, 수피아여학교 학생과 직원, 이일학교 학생과 직원 등이 있어서 금정교회 교인 500여 명 중 300명 정도가 양림정에 살고 있었다. 양림교회가 분립을 요청할 당시 금정교회는 다음과 같이 7개 구역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1. 성내 1구역 

2. 성내 2구역 

3. 성내 3구역 

4. 양림 강변 구역(양림 동편 포함) 

5. 양림 서편 구역 

6. 이일양성학교 구역 

7. 양림 구역 

 

이 7개 구역 중에서 '양림구역'만 분립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이일양성학교구역'은 지리적으로 제중병원과 아주 가까운 곳에 소재하고 있었지만 분립에서 제외하기로 결의했다. 김창국 목사는 당회와 제직회와 공동의회를 거쳐 전남노회 임시노회에 '양림교회'의 분립을 청원했고, 노회는 1924년 9월 30일 그것을 허락하였다. 이것이 중요하다. 노회가 분립을 결의한 것이다. 양림교회들처럼 교인들끼리 싸워서 헤어진 것이 아니다. '양림 구역'에 사는 교인들은 금정교회로부터 나가서 '양림교회'를 설립하도록 전남노회가 결의한 것이다. 김창국 목사는 이 300명 정도의 교인들 중 '이일양성학교구역' 식구들을 제외한 '양림구역'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 오원기념각에서 '양림교회'의 초대 당회장으로서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렸다. 김창국 목사는 이날이 1924년 10월 15일이었다고 적고 있다. 

양림교회를 분립하고 11년이 지난 뒤인 1935년(昭和 10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선교 50주년 역사화보위원회>가 발행한「朝鮮예수敎長老會五十週年歷史畵譜」에 김창국 목사가 게재한 아래의 양림교회 소개광고를 보면 '創立年月日 1924. 10. 15'라고 선명하게 적혀 있다.

 

 

 

그리고 1935년 5월 6일에 양림교회가 주최한 <김창국 목사 교역 25주년 기념식>의 기념식록(記念式錄)과 그 기념식의 꽃인 '기념사'에도 "1924년 10월 5일 본 교회가 錦町敎會에서 分立하야 온바"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89년 12월 30일에 발간된「光州?全南 基督敎名鑑」에 소개한 아래의 양림교회 소개 광고에서 손영호 목사는 '교회설립 연월일 : 1924년 3월 1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924년이다. 양림교회는 1924년에 이 땅에 태어난 것이다. 1924년 이전에는 어떤 언어로도 '양림교회'라는 기록은 없다. 물론 북문안교회를 뜯어다가 금정 101번에 이축하는 몇 달 동안 양림동 소재 오원기념각에서 임시로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북문안교회'를 '양림교회'라고 오기한 '사기'(史記)는 오류의 극치이다. 게다가 김창국 목사를 필두로 도양술 목사, 박석현 목사, 김지석 목사, 김재석 목사, 김준곤 목사, 박종삼 목사, 손두환 목사, 장동진 목사, 인도아 목사, 박장원 목사, 조원곤 목사, 손영호 목사에 이르기까지 양림교회의 역대 당회장들이 지켜온 <교회 창립의 해>는 한결같이 <1924년>이었다. 교회 분립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광주 기독교의 초창기에 '교회의 분립'은 선교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분립시키는 母敎會나 분립해 나가는 子敎會나 모두가 기뻐해 마지않는 큰 경사였다는 사실이다. 그 증거로 1925년 1월 7일자 <기독신보>를 보면, 양림교회 건축 연보자 명단과 연보 금액을 보도하고 있는데, 양림교회 당회장인 김창국 목사가 두 번째로 최고액인 70원, 금정교회 당회장인 최흥종 목사가 세 번째로 많은 60원, 또 금정교회의 당회원들인 이득주 장로가 20원, 황상호 장로가 10원 등의 건축 연보를 하고 있는 점이다. 물론 금정교회의 일반 교인들도 다수가 참여하였다. '믿는 사람'이 친 형제보다도 가깝던 시대였다. 양림교회가 속히 예배당을 건축하고 부흥발전하기를 바라는 전남노회는 이미 교인들을 잘 파악하고 있는 젊고 유능한 김창국 목사로 양림교회를 맡게 하고, 현직 노회장인 최흥종 목사로 금정교회의 당회장을 맡게 함으로써, 두 교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도록 배려하였다. 한편 분립해 나간 양림교회는 광주선교부로부터 양림동 290번지의 언덕 위에 소재한 400여 평의 땅을 기증받아 근 2년의 공사 끝에 1926년 4월 60평의 붉은 벽돌예배당을 준공하고 동년 9월 26일에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이 예배당이 바로 지금의 언덕 위에 있는 '기장 양림교회' 즉, 윗 양림교회이다. 선교사들은 'Hill Church'라고도 불렀다.


 

 17  5대 최흥종 목사

최흥종 목사는 1924년 9월 30일 금정교회 제5대 위임목사로 취임하였다. 4년 전에 북문밖교회로 교인의 반 이상을 내보내고, 또 다시 3/5의 교인들을 양림교회로 내보낸 어머니교회는 본 교회 출신인 최흥종 목사의 부임으로 큰 힘을 얻고 곧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양림교회가 분립해 나간 뒤 금정교회에는 6개 구역의 교인 약 200여명이 남아 있었다. 최흥종 목사가 부임하고 1개월 만에 실시한 세례식에서 15인이 세례를 받고 유아세례교인도 5인인 것을 보면 금정교회는 곧 안정을 되찾았고, 대형교회의 면모를 향해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주 최초의 장로, 최초의 목사, 최초의 기독교사회운동가라는 칭호를 듣는 최흥종 목사는 광주시 동구 불로동에서 태어났다. 최흥종 목사의 본명은 최영종(崔泳琮)이었다. 최흥종 목사는 청소년기에 무쇠주먹을 휘둘렀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런데 광주 선교부가 개설된 후 김윤수 씨의 인도로 배유지 선교사 집에 드나들다가 광주의 초대교인이 되었다. 최흥종 목사는 1912년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초대장로로 장립되었고, 1917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기도처로 모이고 있던 '북문밖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함으로써 목회자가 되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도 '광주나병원' 일에 더 적극적이었다. "최흥종 집사가 나환자를 업고 광주천을 건너는 모습"을 광주 사람들은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광주나병원을 방문했던 <기독신보>> 기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병원을 주관하는 의사는 알 엘 윌손 씨요, 조선 형제로 이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하는 이는 최 장로 흥종 씨다”

 

금정교회로 부임하기 직전인 9월 14일에 전남노회장에 취임한 바 있는 최흥종 목사는 전남노회의 업무만이 아니고 신간회와 YMCA 및 노동공제회 등, 많은 사회단체의 책임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청년들과 사회운동에 뜻있는 사람들이 교회로 많이 모여들었다. 최흥종 목사는 1925년 9월 28일 자신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배유지 목사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는 슬픔을 겪기도 한다. 광주나병원이 1926년에서 1927년까지 여수군 율촌면 신풍리로 이전하게 되자 최흥종 목사는 우일선 선교사의 이전 작업을 돕기 위해 1925년 12월 6일 금정교회를 사임하였다. 최흥종 목사는 우일선 선교사와 함께 봉선리 나환자진료소를 세운것 외에도 여수애양원, 나주 호혜원, 광주 송동원, 무등원 등을 설립하여 구라운동과 빈민운동에 평생을 헌신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허백련 화백과 함께 삼애(三愛)학원을 설립하여 가난한 농촌 청년들을 교육하였고, 두 번이나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되어 국경을 넘는 선교활동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말년에는 스스로 사망통지서를 내고, 무등산 기슭 오방정에 은거하면서 성경과 노자의 도덕경에만 심취해 있었으나, 나병환자 수용시설에 대한 지원이나 걸인들에 대한 보호가 필요할 때에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곤 하였다. 그가 1966년 5월 14일 86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자 광주시는 5월 18일 광주공원에서 광주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국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예우하여 대전 국립묘지에 그를 안장하였으니 그의 애국적인 기독교사회운동에 대한 보답이었다.

 

 

 18  6대 김응규 목사

금정교회는 1926년 3월 14일에 제6대 김응규 목사의 위임식을 거행하였다.

 

 

 

김응규 목사는 1917년 평양신학교 제10회 졸업생으로서 신앙심이 두터워 전도에 중점을 두는 목회를 하였다. 김응규 목사 시무 중 황상호 장로가 나주읍교회로부터 이명전입 하였고 유상원 집사가 장로 장립을 받아 당회는 더욱 강화되었다. 김응규 목사는 특별히 유치원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김응규 목사는 1928년에는 전남노회 부노회장에 피선되었는데, 1929년 11월 23일 금정교회를 사임하였다.

 

 

 19  7대 이경필 목사

1930년 2월 1일에 제7대 위임목사로 이경필 목사가 부임하였다. 충남 금산 태생으로서 제주도 선교사로 오랫동안 헌신한 분이었다. 부임 직후 광주시청에서 남광주역까지의 ‘신작로’ 공사 관계로 교회의 일부가 헐리게 되자, 금정 126번지에 부지를 마련, 1931년 5월 8일에 정초식을 가졌으며, 1933년 7월, 51평의 예배당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유치원 건물 40평도 동시에 건축하였다.

 

 

 

이경필 목사는 5월 8일 정초식 때 머릿돌 밑에 금정교회의 타임캡슐을 묻었다. 이 정초식에 선교사 다섯 분이 초대되었는데, 이들은 금정교회를 창립하고 오랫동안 초대 당회장을 지낸 배유지 목사를 기리면서, ‘유진 벨 박사에 대한 정보’라는 문서를 현장에서 작성하여 타임캡슐 속에 동봉하였다. 그 다섯 분은 노라복(Rev. Robert Knox) 목사 부부, 남대리(Rev. LeRoy T. Newland) 목사, 도마리아(Miss Mary Dodson) 선교사, 서서평(Miss Elizabeth J. Shepping) 선교사 등이었다.

 

 

 

이경필 목사는 일제의 강압으로 1939년 4월 8일부터 당회록에 쇼와(昭和) 연호를 사용하고, 1940년 10월 22일 당회록부터는 ‘이경필’ 대신에 창씨 개명하여 일본식 이름인 히로끼 미치(廣木 道)로 당회록에 서명한 점 등으로 보아, 교회 안에까지 미친 일제의 탄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하고 있다. 이경필 목사는 결국 일본말로 설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42년 11월 14일 금정교회를 사임하였으며, 1949년 9월 14일 제41회 전남노회에서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1937년 7월 7일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점령해 들어가면서, 한국에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회와 교인들을 가차 없이 핍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는 1938년 9월 10일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총대들을 대표하여 부회장 김길창(金吉昌, 경남노회) 목사의 안내로 23명의 노회장들이 평양의 신사를 참배하였다. 이것은 한국기독교사에 큰 오점을 남기는 일이었다. 1940년에 시작된 미국 선교사들의 출국은 1942년에 이르러 대부분 한국에서 철수하였다. 1943년 5월 8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의 발족에 따라 종전의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산하 27개 노회는 15개 교구로 축소 개편되었다. 1943년 5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이 전남노회를 해산하고 ‘전남교구’를 발족시키면서 금정교회는 교구 사무실로 사용하고, 중앙교회와 양림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하다가, 양림교회가 무기고로 쓰이면서는 중앙교회에서만 예배를 드리고 금정교회에서는 주일학교를 모이게 했다. 나머지 교회들은 매매되거나 ‘공장’으로 전환되었다. 전남교구에 남겨둔 3개 교회의 당회장은 정경옥(鄭景玉) 목사가 맡았다. 정경옥 박사는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감리교신학교 교수를 역임하다가 교수를 그만 두고 향리인 진도에 칩거하고 있었는데, 광주지역 교회 지도자들의 요청과 청빙을 받아 전남교구를 담임하였다. 정경옥 박사는「기독교의 원리」(1935),「기독교 신학개론」(1939)이란 저서를 발간한 우리나라 조직신학의 태두였는데, 1945년 봄 복막염을 앓다가 해방을 보지 못하고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20  8대 성갑식 목사와 교회재건

해방을 맞이한 금정교회는 10월부터 예배를 드리다가 전남교구의 전도사를 지낸 성갑식 목사를 1945년 11월 3일 제8대 담임목사로 맞았다. 이득주 장로, 김윤경 장로, 이교환 장로, 정인보 장로로 당회를 구성하였고, 그 이듬해에 김용수 장로를 장립하였다.

 

 

 

성갑식 목사는 전북 익산 태생으로 평양신학교와 미국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해방 후 혼란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흩어졌던 교인들을 결집시키고, 당시 교회에까지 침투하던 좌경 사상을 단호히 경계하는 등 금정교회의 재건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성갑식 목사는 교회를 9개 구역으로 확대 조직하였고, 당회가 직영하던 유치원을 이사회가 운영하도록 하고, 유치원 이사로 성갑식, 김용수, 이교환, 조철환, 정인세, 현덕신, 구병순, 조아라 등 8분을 두었다. 교우들이 돌아오면서 부인전도회는 김필례 씨가, 유치원은 현덕신 씨가, 청년회는 정인세 집사와 김현철 집사가, 주일학교는 이교환 장로가 맡아서 재건하였다.

 

제일유치원

금정교회가 유치원을 부설한 것은 1922년 4월 김창국 목사가 부임한 직후였다. ‘금정유치원’은 자모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성인전도의 창문이기도 했다. 유치원생은 주로 기독교인 자녀들이었지만 불신 원생들은 대개 이 지역 유지들의 자녀였기 때문에 그 원생들은 기독교가 상류층으로 전파되는 통로 역할을 했다. 그래서 금정교회는 예배당을 신축할 때도 유치원 건물 확보를 우선순위에 두었던 것이다. 초기의 유치원을 이끌어간 분은 유상원 장로, 김태오 집사(후에 서울 중앙대학교 총장 역임), 그리고 일본 여의전 출신의 여의사 현덕신 집사였다. 현덕신 집사는 개업 중인 의사이면서도 몸으로 봉사하는 것은 물론 재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녀의 남편 최원순(崔元淳) 씨는 독립투사이며 동아일보 주필을 지낸 분이었다. 1922년에 개원하여 40년간 지속해온 제일유치원은 예배당 신축을 위해서 1962년 9월에 문을 닫고 그 건물이 헐리게 되었다. 참으로 섭섭하였지만 부득이한 일이었다.

 

 

 

1947년 8월 30일 성갑식 목사는 금정교회를 사임하고, 전주신흥고등학교 교목을 거쳐, 대한예수교장로회 교육부 총무, 서울노회장, 대한기독교서회 총무를 역임하였다. 성갑식 목사가 사임한 후 금정교회는 임시 당회장으로 김창국 목사를 초빙하고 담임목사 청빙을 위한 새벽기도회를 일주일간 실시하였다. 그러나 정기환 목사가 제9대 위임목사로 부임한 것이 1948년 10월 3일이었으니, 김창국 목사는 거의 1년 가까이 임시 당회장으로 수고한 것이다.임시 당회장 김창국 목사는 1948년 5월 9일 제38회 전남노회에서 교회명을 ‘남부교회’로 개명하였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金井昶國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해야 했던 김창국 목사는 일제의 잔재가 스며있는 ‘정(町)’ 자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1  9대 정기환 목사와 남부교회

정기환 목사는 1939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북지방에서 목회하던 중 금정교회의 청빙을 받고 1948년 10월 3일 제9대 위임목사로 취임하였다. 정기환 목사의 시무기간은 짧았지만 이 남부교회 시절에 교회는 크게 부흥하여 주일예배 집회수가 300 ~ 450명이었고 수요예배도 200여명이 모였다. 아마도 해방 후의 혼란한 사회분위기와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정계 지도자들 중 다수가 기독교 신자였던 탓도 있었던 것 같다. 정기환 목사는 1년 반 정도 시무하고 1950년 3월 30일 사임하였다.

 

 

 

* 1949년 4월 22일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로 총회 명칭을 변경하였다.

 

 

 22  10대 김재석 목사와 6.25전쟁

 

 

 

남부교회는 광주서부교회에 시무하는 김재석 목사를 제10대 위임목사로 청빙하여 1950년 6월 11일 주일에 위임식을 거행하였다. 그런데 두 주일 후에 6·25 동란이 일어나고 7월 23일에 광주까지 내려온 공산군은 9?28 수복 때까지 두 달이 넘게 광주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부교회는 6월 25일 주일부터 9월 10일 주일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예배를 드렸다. 초기에는 김재석 목사가 주일예배를 인도했고, 7월 30일부터는 김현철 집사가 설교를 맡아 주일예배를 인도하였으나, 9월 17일과 24일의 주일예배 기록이 예배일지에 없는 것으로 보아 9?28 수복 직전에는 교회에 어려움이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으로 인해 금정교회 교인들은 큰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제3대 위임목사였던 남궁혁 박사가 납북되고, 박초진 집사와 김필례 집사의 남편 최영욱 박사, 그리고 초기에 금정교회를 재정적으로 많이 도와주었던 현준호 씨가 피살된 것이었다.


 

 23  광주제일교회

1952년은 남부교회에 세 가지 경사가 겹친 해였다. 하나는 김재석 목사가 4월 29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7회 총회장으로 피선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5월에 교회 증축(20평)을 시작하여 6월 1일 완공함으로써 71평의 예배당과 40평의 유치원을 확보하게 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9월 16일 제46회 전남노회가 ‘광주의 어머니교회’라는 의미를 담아 교회 이름을 ‘광주제일교회’로 개명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시무 중인 위임목사가 총회장에 당선되고, 교회를 증축하고, 어머니교회의 이름을 찾고, 광주제일교회에는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하고 있었다.

 

기장과 예장의 분열

해방 후의 사상적 혼란기에 전쟁까지 겹친 한국 교계는 어지러웠다. 1953년 4월 29일 제38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김재준 목사가 ‘제36회 총회의 결의사항을 위반하고 성경의 유오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김재준 목사의 목사직을 파면하였다. 그러자 조선신학교 측이 동년 6월 10일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조직하여 예장총회로부터 분열해 나갔다. 이때 금정교회가 분립하여 언덕 위에 세웠던 양림교회도 분열이 되어 200여명의 교인들이 오원기념각으로 나와 따로 예배를 드렸다. 그러자 광주선교부가 이들에게 양림동 92 ~ 10번지의 땅 400여 평을 기증하여 2년 만에 교회를 건축하고 입당한 것이 오늘의 통합 측 양림교회 즉, 정원이 아름다운 아래 양림교회이다. 이런 교계의 혼란과 전쟁의 후유증 속에서 김재석 목사는 교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뒤, 1956년 6월 30일 본 교회를 사임하고 광주숭일고등학교 교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광주제일교회는 1956년 12월 22일에 여수애양원신학원의 선재련 목사를 제11대 담임목사로 청빙하였다.


 

 24  11대 선재련 목사

 

 

 

선재련 목사는 1898년에 순천에서 태어나 광주숭일학교 고등과를 마치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초등학교 교원으로 5년을 근무했고, 목사가 된 후에는 3년여 동안 순천 매산중?고등학교 교목으로 봉직하였다. 선재련 목사가 부임할 당시 광주제일교회는 전쟁을 겪은 건물답게 낡고 기울어져서 통나무로 4곳을 받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교회 건축을 제1목표로 설정한 선재련 목사는 위임식도 뒤로 미룬 채 긴축예산 집행을 목적으로 회계를 경상회계, 계절회계, 특별회계로 3분하여 재정을 관리케 하고, 헌금봉투를 처음으로 사용케 함으로써 헌금에 대한 교인들의 인식을 정립하였다. 선재련 목사의 지도로 광주제일교회는 1962년 9월에 유치원 건물을 철거하고 시멘트 벽돌을 만들기 시작했다.

 

성전 신축

1963년 3월 14일 성전 신축 기공식을 거행하고 머릿돌 밑에 성경, 찬송가, 교회 연혁, 제직 명단, 건축헌금 방명록, 건축위원 명단을 넣어 타임캡슐을 묻었다. 1965년 4월 12일 제2차 공사 기념예배를 드리고 4년 만인 1967년 10월 20일 벽돌로 지은 지상 3층 연건평 305.5평의 예배당을 준공하였다. 1968년 10월 16일 광주제일교회는 교회창립 64주년 기념식 및 헌당식을 거행하였는데, 마침 같은 날 광주제일교회에서 전남노회 제75회 추기노회가 개최되어 서울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가 개회 설교를 담당함으로써 교우들의 피와 땀이 이루어낸 광주제일교회 새 성전은 더욱 빛을 발휘하였다.

 

 

 

선재련 목사는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운 가운데서도 특수 전도에 힘을 쏟아 중등성경구락부를 개설하여 야간중학 과정을 무상으로 가르쳤고, 농아부를 신설하여 매주일 40 ~ 50명의 농아들이 교회에 출석하여 수화로 예배를 드렸다.

 

 

 

신림, 동광, 영락교회 개척

선재련 목사는 자신의 사례비도 제대로 못 받는 교회의 재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1958년부터 무등산 ‘기도소’에 재정을 지원하여 그 기도소가 오늘의 신림교회로 성장 발전하게 하였고, 1961년에는 대인교회(현, 동광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70년 6월에는 석천교회(현, 영락교회)를 개척하였다.

 

 

 

1972년 12월 30일 본 교회를 정년퇴임한 선재련 목사는 그 후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연약한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다가 1985년 9월 12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광주제일교회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광주제일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25  12대 천방욱 목사

 

 

 

천방욱 목사는 전남 무안에서 천기조 장로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광주 숭일중·고등학교·전남대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장로회신학대학 본과를 마쳤고 군복무 후에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도미하여 신학을 공부한 후 귀국하여 1970년 11월 22일 광주제일교회 부목사로 취임해서 교회학교와 청년회를 맡아 성경공부에 역점을 두었다. 또한 기독교방송(CBS)을 통한 방송전도에 힘을 기울였으며 평신도 훈련에 힘써서 그들로 하여금 무의탁 결핵환자들의 집단부락인 무등자활원(무등자활원)을 위하여 1가구 100원 돕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천방욱 목사는 1971년 1월 1일부터 담임목사를 승계하였으나 호남신학교(현,호남신학대학교)에 출강하는 등 학자적 목사로서 도미유학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1972년 7월 30일자로 당회장을 사임하기로 사임서를 제출하자, 당회는 1972년 7월 2일 회의를 소집하고 임시 당회장으로 호남신학교 교수 황성욱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의 하였다. 다시 8월 27일 당회는 후임목사로 군산노회 소속 군산동부교회에서 시무중인 한완석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의 하였다.


 

 26  13대 한완석 목사

한완석 목사는 전북 익산 태생으로 일본 흥문중학교, 중앙대학 교육과, 장로회신학대학, 미국 컬럼비아 신학원을 졸업했고, 군산 동부교회에서 17년간 시무하다가 1973년 2월 27일 광주제일교회의 제13대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한완석 목사는 부임과 동시에 제직훈련과 성경읽기 운동을 전개하고 주보를 통한 성경통신과를 실시하였고, 크로스웨이, 베델성서대학을 도입하여 각종 이단이 횡행하던 세기말적 사회분위기 속에서 교인들의 신앙이 흔들림 없이 믿음생활을 하도록 지도하였다. 교회창립 70주년을 앞두고는 ‘역사편찬위원회’(강해성, 한덕선, 구창환, 문영순)를 구성하여 1975년 교회창립 70주년을 맞아「第一敎會七十年史」를 발행함으로써 광주교회사 연구의 시작을 알렸으며, 광주의 어머니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한완석 목사는 신문 방송 활동을 비롯해서, 평통자문위원, 시?도청 자문위원, 공무원 연수, 군부대 선교, 재소자 선교 등에 힘써 그 공로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1987)과 교정대상(矯正大賞, 1991)을 받았다. 1975년에는 교회창립 70주년 기념으로 예배당을 30평 증축하고 9월 25일에 제60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가 광주제일교회에서 개최되어 한완석 목사가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광주제일교회는 배유지(3회) 이기풍(10회) 남궁혁(21회) 김재석(37회) 한완석(60회) 목사 등 총회장을 다섯 분이나 배출한 교회가 되었다. 또한 한완석 목사는 젊어서부터 전국 청년면려회(CE) 총무를 시작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서기, 총무 등을 역임하였고, 특별히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대를 1954년부터 1994년까지 40년간 근속한 분으로, 1993년에 총회로부터 ‘총회총대 근속40년 표창’을 받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1996년 8월 26일부터 1개월간 ‘한완석 목사 총회총대 근속40년 기념사진전’을 개최하여 그의 기네스적 기록을 기리었다. 한완석 목사는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하여 서독, 태국, 싱가포르, 케냐, 캐나다, 소련, 대만, 일본, 동구권과 미국장로교 및 호주장로교 등을 방문하여, 이들 나라 교단들과 우리 교단과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세계화에 크게 이바지하여 미국 클린턴장로교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미국 캘리포니아신학원에서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국제 자매결연

1977년에는 동북아시아신학자대회에 참석하여 동경 시나가와(品川)교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청년국제봉사단 하계 봉사대회(Koinonia Camp)를 한국과 일본에서 1년에 두 번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매년 여름에 두 교회가 번갈아서 개최하여오다가, 1984년 8월 8일에는 대만 까오슝(高雄) 신흥교회와 삼각 자매결연을 맺어, 3국이 순번으로 코이노니아 캠프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격년으로 개최되고 있는데, 제14회 코이노니아 캠프는 2002년 8월 8일(木)부터 12일(月)까지 광주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고, 2004년에는 대만 신흥교회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신흥교회의 담임목사가 교체되는 해여서 2005년으로 연기되었다. 세 나라의 교회 지도자들은 이 코이노니아 캠프를 젊은이들이 주체(主體)가 되는 youth camp로 전환할 것에 합의한 바 있다.

 

대구삼덕교회와 자매결연

국내에서는 광주제일교회 남선교회가 대구삼덕교회 남선교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영?호남인들 사이에 내재된 동서(東西)간의 갈등의식을 해소하기 위해 매년 5월 중에 두 교회의 교우들이 상호 상대방 교회를 방문하여 ‘영?호남친선교류헌신예배’를 드리고, 친교를 나누면서 동서간의 이해를 넓혀오고 있는데, 지금은 전 교회적인 큰 행사로 발전하였다.

 

 

 

한완석 목사는 교회 지도자 육성에도 중점을 두어 광주제일교회 시무 20여 년 동안 27명의 장로 장립과 8명의 장로 취임, 58명의 집사 안수와 3명의 집사 취임, 그리고 52명의 권사를 임직시켰다. 이렇게 육성해낸 지도자들이 전남노회장, 전국 남녀선교회연합회장, 전남노회 남녀전도회연합회장 등 총회와 노회의 수많은 요직을 맡아 한국 교회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해왔다. 1981년부터 광주제일교회는 목사관(52평) 신축, 교육관(254.7평)과 교역자 사택(53평) 구입 등 부대시설 확보에 큰 진전을 이룩했다. 또한 교회창립 80주년 기념으로 1981년 6월 27일 화정동 730 ~ 9번지에 광주제이교회(현, 염주제일교회)를 개척하였다. 교인들의 증가와 교회의 조직 강화로 여러 기관들이 분화되면서 그 기관들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예배 시간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1981년 6월 7일부터 2부 예배를 드렸고, 1992년 1월 5일부터는 3부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회창립 90주년 기념식 거행

1994년 12월 15일 광주제일교회는 교회창립 90주년을 맞아「光州第一敎會九十年史」를 발간하여(편집위원: 장규석, 한기화, 한덕선, 구창환, 문규성) 교회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재확립하였다. 기념식에는 광주제일교회의 한국인 초대 당회장 이기풍 목사 후손, 초대 장로 김윤수, 최흥종 장로/목사 후손, 이득주 장로 후손, 김창국 목사 후손 등 많은 믿음의 후예들이 참석하여 창립90주년을 함께 축하하였다.

 

 

 

또한 1994년 1월 28일에는 교회창립90주년 기념으로 광주시 두암동에 광주두암교회(현, 풍성한교회)를 개척하였다.

 

 

 

국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자 1980년 후반부터 주차장 문제가 발생하고, 주민의 이동에 따르는 인구 밀집지역이 새로이 형성되어, 금동은 교회가 자리하기에는 지리적으로 취약점이 너무 많아 자연스럽게 교회 이전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마침 한국 국군의 요람이었던 ‘상무대’가 장성으로 이전하고, 그 땅에 광주의 도약을 상징하는 신도시의 개발계획이 확정되자, 광주제일교회 공동의회는 1993년 상무 신도심에 새 성전을 신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종교부지 1,000 평을 확보하기 위한 각 종파와 각 교단의 경합이 실로 치열하였다. 마침내 1994년 5월 31일 광주기독교 34개 교단협의회는 “광주의 어머니 교회인 광주제일교회에 우선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광주제일교회는 그해 9월 28일 ‘종교부지’ 1,000평에 대한 매매계약을 채결하였다. 한완석 목사는 소병림 사모와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경건연구소 소장)과 3남은 목사(광주명성교회), 2남(숭실대학교 교수)과 2녀(한남대학교 교수)는 대학교수로 키워낸 모범적인 목회자 가정을 이루었다. 한완석 목사는 1995년 5월 21일 광주제일교회를 정년퇴임하고 광주제일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되어 전국 각지로부터 중요 집회의 강사로 초청을 받아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2007년 9월 1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한완석 목사의 장례식은 자신이 토지를 매입했던 치평동의 광주제일교회 새 성전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치러진 후 광주제일교회 묘지인 제일동산에 안장되었다. 소병림 사모도 뒤를 이어 2010년 1월 23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교회묘지인 제일동산 한완석 목사 옆에 안장되었다.


 

 27  14대 문성모 목사

 

 

 

문성모 목사는 충남 대전 태생으로 서울예술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국악), 장신대 신대원과 장신대 대학원을 거쳐 독일의 뮌스터대학과 오스나 부뤽대학에서 예배학과 음악학을 연구한 철학박사로서 호남신학대학교에서 예배학, 설교학, 음악학을 강의하다가 1995년 8월 13일 광주제일교회의 제14대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예배 쇄신

“복음은 불변이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변할 수 있다. 예배는 복음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응답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 민족과 문화에 따라 그 형태와 내용이 다양성을 지닐 수 있다. 예배는 축제다. 축제의 자리에는 계급이나 우월주의가 있어서는 안 된다. 구경하는 예배에서 참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언어만이 아니라 비언어적인 요소들이 예배에 적용될 수 있다.”

 

예배를 이렇게 정의한 문성모 목사는 한국 교회가 선교사들이 전해준 미국식 예배양식을 무조건 표방하는 것을 비판하고, 한국적 예배모형을 개발하여 전국에 보급하는 등 전통적 예배양식에서 허식을 거둬내려고 노력했다. 우선, 주일 낮 예배의 대표기도를 장로만이 아닌 모든 항존직이 맡도록 하고, 헌금 주관도 장로가 아닌 안수집사가 맡게 했으며, 설교자와 기도자가 착용하던 가운을 벗게 하고, 예배당에 불문율처럼 정해져 있던 장로석을 없애고 일반 성도들과 섞여 앉도록 했다. 예배의 중요 요소인 성경과 찬송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 오후예배는 교인 교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교부들의 신앙 및 교회음악과 관련된 테마교육을 실시하였고, 성경공부를 권장하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100일 성경통독 새벽기도회’, ‘필사성경’ 등을 장려하여 교인들이 성경을 가까이 하도록 유도했으며, 수요예배는 성경강해를 함으로써 성경을 생활화하도록 지도하였다. 동시에 자신이 손수 영성훈련에 참가한 후 교우들에게 참여를 적극 권장함으로써 교우들이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도록 지도하였다.

 

사회봉사

문성모 목사는 우리나라가 1998년 IMF 위기를 맞아 주민들의 생활이 궁핍에 처하자 교회의 대 사회봉사 분야를 강화하여 기존의 사랑의 식당을 활성화하고, 무료법률상담, 무료 이·미용 봉사, 결식아동 돕기, 사랑의 쌀 나누기, 미자립 농어촌교회 돕기 등에 교회의 힘을 모았다.

 

새 성전은 만세반석 위에

상무대의 종교 부지를 매입한 광주제일교회는 문성모 목사의 인도로 1999년 11월 1일~6일까지 ‘새 성전 기공식을 위한 교구별 특별 새벽기도회’를 가졌고, 남선교회를 비롯한 각 기관들이 ‘현장방문 기도회’를 계속하는 한편, 기공식 후에는 기관별로 공사 현장을 방문하여 관계자들을 격려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때마침 발생한 일본 고베의 강진으로 인하여 기존의 설계를 내진설계로 변경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일치단결된 기도의 굳건한 반석 위에 새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

 

 

 

새성전 기공식

1999년은 국가가 금융 부도를 당한 참담한 시기였으나 광주제일교회는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의 적극적인 협조로 금동 소재 예배당의 매매가 쉽게 이루어져, 1999년 11월 7일 상무지구에서 일본과 대만의 자매교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감격적인 새 성전 건축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광주제일교회는 금동의 예배당 자리에 ‘광주의 모 교회 광주제일교회 옛 터’라는 기념비를 남겼다.

 

 

 

21세기 찬송가 공회 위원으로서 찬송가의 한국화와 예배의 한국화를 시도하는 등 쉴 새 없는 개혁 드라이브를 추진하던 문성모 목사는 대전신학대학교 이사회로부터 총장 청빙을 받고 2000년 8월 31일 광주제일교회를 사임하였다.

 

 

 28  15대 백경홍 목사

백경홍 목사는 충북 청주 태생으로 연세대학교 신학대학과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독일의 뮌스터대학교와 괴팅엔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시무하다가 2000년 12월 3일 광주제일교회 제15대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백경홍 목사의 부임 초기에는 성전건축이 진행 중이어서 배유지홀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예배당이 완공되자 2001년 6월 17일 새 성전에서 입당예배를 드리고, 교회 앞마당에 ‘교회이전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2001년 10월 14일 본당 입당감사예배와 함께 백경홍 목사 위임식을 거행하였다.

 

열린 예배와 영성 훈련

백경홍 목사는 부임 후, 열린 예배와 영성훈련 그리고 국내외선교를 지향하는 목회의 비전을 가지고 그것들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선 많은 찬양팀을 조직하고 활성화 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새벽기도와 금요기도 등을 강화하고, 교회 조직을 개편하여 교회부설 기관으로 ‘배유지선교회’, ‘광주교회사연구소’, ‘이기풍장학회’를 두어 국내?외 선교의 활성화와 교회사의 정립, 그리고 교역자 및 교인자녀 장학 사업에 교우들의 관심을 결집시켰다. 배유지선교회는 해외선교를 효율화하고 외국인과의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2002년부터 영어성경반(지도: 박주경 집사, 호남대학교 영어학과 교수)과 중국어성경반(지도: 이정림 집사, 전남대학교 중문학과 교수)을 운영하고 있다.

 

아둘람제자학교

‘아둘람’이란 말은 사무엘상 22장에서 따온 말이다. ‘아둘람제자학교’에서는 학생을 ‘아람원’이라 하고, 아람원을 가르치는 선생을 ‘아람장’이라 부른다. ‘아람’이란 말은 아둘람에서 ‘둘’자를 뺀 것이다. 광주선교 100주년을 앞두고 광주의 어머니교회인 광주제일교회는 광주의 성시화를 내다보며 2002년부터 성경공부를 통해 온 성도들이 새롭게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 소그룹으로 모여 서로의 삶을 나눔으로써 주님의 제자로 세움을 받자는 목표 아래, 2002년 3월 3일 아둘람제자학교를 개교하여 2004년 11월 현재 1단계 206명, 2단계 245명, 3단계 136명, 4단계 102명, 5단계 99명, 6단계 21명으로 총 809명이 아들람제자학교의 아람장과 아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단기선교와 선교학교

백경홍 담임목사는 부임 후 교회의 목표를 ‘열방을 향한 교회’로 정하고 ‘선교하는 교회’를 선포하였다. 2001년 4월에 의료선교회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개인적인 회원 가입과 헌금, 자비량을 우선하는 원칙을 세워 출발하였다. 그해, 5월5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한성교회에서 의료, 미용, 어린이 사역, 영화 상영을 시작으로 국내 의료봉사가 시작되었으며, 6월17일부터 8월 12일까지 ‘제1기 선교학교’를 열어 해외선교 전반에 관한 교육과 영성훈련을 하였다. 드디어 2001년 7월 31일 기도로 준비하던 33명이 중국 G성의 소수민족인 D족에 의료, 미용, 어린이 사역, 구제, 탐방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 후 매년 선교학교와 단기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를 실천하고 있다.

 

 

 

다니엘 선교학교

2001년부터 광주제일교회는 ‘차세대를 다니엘처럼 키우자’라는 주제 아래 매년 3주간씩 ‘다니엘 새벽기도회’를 실시하고, 또한 ‘기도학교’를 운영하여 기독교의 근본인 기도와 예배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와 실천이 동반되도록 지도함으로써 ‘차세대를 다니엘과 같은 영적 지도자’로 육성하는 일에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2004년에는 초등, 중등 주일학생과 그 학생의 학부형(부모 중 한 분은 반드시 참석)을 대상으로 3개 팀을 조직하여 17주 동안 ‘다니엘선교학교’를 운영하여 참가자 전원이 선교정신으로 무장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다니엘선교학교를 종강하면서는 학생들이 자비량으로 ‘다니엘선교학교 제1기 전도여행’을 실시하여 ‘국내 교회순례 선교여행’과 ‘금강산 땅 밟기 선교여행’을 실시하였다.

 

 

 

대화교실

광주교회사연구소는 2004년 6월 한 달 동안 ‘대화교실’을 열고, 참가자 전원이 교회사 자료를 같이 읽으면서 교회사를 익혀가는 세미나식 학습방법을 통하여 광주선교 초기까지를 공부하고,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 관계로 대화교실을 일시 중단한 상태인데, 앞으로 ‘대화교실’에 많은 교우들이 참여하여 올바른 교회 역사(正史)를 공유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의식을 고취시킴은 물론, 광주제일교회의 역사적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29  교회창립100주년 기념행사

광주제일교회는 2004년 교회창립100주년을 맞아 매월 한 가지 이상씩 기념행사를 거행하였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박종호와 이삼열 오케스트라 콘서트

3월에는 ‘CBS개국 50주년기념 및 광주제일교회창립100주년기념 박종호 콘서트’를 이삼열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2,000여 관중과 함께 광주문예회관 대강당에서 개최하여 대강당을 메운 광주의 복음 선교 100년과 광주제일교회가 걸어온 자랑스러운 한 세기의 발자취를 드높이 찬양하였다.

 

 

 

이날 공연은 임마누엘찬양대 지휘자인 김성훈 집사가 손수 작사 작곡한 “예수”를 작곡자의 직접 지휘로 광주제일교회연합찬양대가 연주하면서 그 피날레를 장식하였는데, 근래에 보기 드문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화음으로 광주제일교회 교인들에게 자부심을 안겨준 연주로 평가되었다.

 

인세반 박사 초청 세미나

4월에는 유진벨재단 회장 인세반 박사초청 세미나를 열고 북한의 실상을 생생한 화면과 함께 듣고 봄으로써, 온 교회가 큰 감명을 받고 북한선교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정립하였으며, 또한 이 자리에서 박종호 콘서트의 수익금 전액을 북한의 결핵퇴치사업에 써달라고 인세반 회장에게 전달하였다.

 

 

 

해외선교사 파송

광주제일교회의 선교 2세기는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비전으로 해외 선교에 역점을 두고 ‘배유지선교회’를 통하여 2001년부터 매년 1회씩 해외의 미전도 종족에게 의료 및 이?미용 봉사 단기선교를 실시하여오고 있는데, 지금까지 연인원 155명이 참가하였고 현지에 춘타이향 베이장 위생소(春台鄕北庄衛生所)를 건축 기증하였다. 배유지선교회는 해외선교를 위하여 12주간 코스의 ‘선교학교’를 개설하고, 국내?외의 권위 있는 강사 및 선교사들을 초빙하여 참가 신청자들을 대상으로 2001년 이후 매년 선교마인드 개발 및 선교실제를 교육하여오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외국인 근로자와 농어촌 미자립 교회 등을 중심으로 의료 및 이?미용 봉사선교를 연중무휴로 실시해오고 있다. 특별히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배유지선교회가 단독으로 서 인 선교사 가족을 아프리카에 파송한 것은 광주제일교회 100년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서 인 선교사는 조선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치과의원을 개업하여 크게 성공한 치과의원 원장인데, 일찍부터 해외선교에 뜻을 두고 외국어 공부에 열중하면서 선교마인드를 키워왔고, 파송 직전에는 1년 동안 미국의 열방대학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았고 또 캐나다에서 불어를 공부한 ‘준비된’ 선교사로서 광주제일교회가 100년간 진 빚을 갚기 위해 단독 파송한 광주제일교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주민초청 한마당 잔치

광주제일교회는 오래전부터 예배, 교육, 선교, 봉사의 4대 목표를 향해 매진해왔고, 특히 IMF 이후 대 사회봉사 사업에 많은 시간과 재정을 투자해왔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2004년 10월 3일(주일) 오후에 치평동 시민운동장에서 ‘주민초청 한마당잔치’를 개설하여, 3,000여명의 주민과 교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각종 전통놀이를 즐기고, 풍부한 음식과 교제를 나누는 뜻 깊은 잔치를 가졌다.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 초청예배

광주제일교회는 이 지역의 어머니교회로서 모든 교회들을 포용하여 광주의 복음화와 세계 선교에 매진한다는 원칙 아래, 2004년 11월 21일 주일 오후예배에 광주제일교회의 전신인 북문안교회가 1920년 9월 4일에 광주 최초로 분립한 바 있는 광주중앙교회(합동 측)의 채규현 담임목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림으로써 교단을 뛰어넘는 화합의 장을 열었다.

 

 

 

이 예배에서 채규현 목사는 광주중앙교회가 “84년 된 교회”라고 언급함으로써 광주중앙교회 역사는 사실상 전남노회가 금정교회로부터 북문밖교회의 분립을 결정한 1920년 9월 4일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예배

광주제일교회는 2004년 12월 5일에 교회창립100주년 기념예배 및 새 성전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이 기념예배에는 설립자 배유지 목사의 외증손 인세반 박사, 제2대 당회장 이기풍 목사의 증손 이준호 목사, 제4대 당회장 김창국 목사의 4남 김현구 장로를 비롯해서 역대목사 장로의 후손들이 참석하였고, 제12대 당회장 천방욱 목사, 13대 당회장 한완석 목사, 14대 당회장 문성모 목사가 참석하여 각종 순서를 맡았으며, 초대 전도사였던 지한홍 목사의 장남 지상섭 목사 부부는 장학금을 지참하고 참석하였다.

 

 

 

'조용한 혁명’이란 제목의 기념예배 설교에서 총회장 김태범 목사는, “씨 뿌린 농부는, 국회에서 무슨 특별법을 통과시키듯이, 그렇게 성급한 성과를 기대하지 않는다. 성도는 뿌린 씨앗의 1/4에서만 수확을 기대하며 가을을 기다린다. 하나님의 복음은 ‘조용한 혁명’을 일으킨다. 선교 2세기의 장을 여는 광주제일교회도 이 지역의 모교회로서 앞으로 ‘조용한 혁명’ 사업을 이어가는 모범적인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권고하였다.

 

 

 

이 기념예배 직전에는 기념비 제막식, 기념 식수, 타임캡슐 봉함식, 사진전시회 개막식을 각각 해당 장소에서 거행하였다.

 

 

 

 

 30  광주선교 2세기를 맞이하며